나는 어릴 때부터 말하는 걸 좋아했다.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떠오르는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건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말하는 법’은 익숙했어도, ‘대화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자랐다.
대화란 서로의 말이 오가고, 침묵도 흐르고, 상대를 향한 배려가 담겨야 완성되는 것인데, 나는 그런 흐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도, 침묵을 견디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냈고, 돌아와선 후회했다.
“왜 그렇게 푼수처럼 굴었을까…”
하지만 그 후회는 오래가지 않았고, 같은 패턴은 계속 반복되었다.
나는 상대에게 묻는 법을 몰랐다.
어릴 적부터 질문은 실례가 될 수 있다고 배웠고, 내 이야기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방식이라 믿었다.
그 결과, 나는 항상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고, 내 말은 점점 혼잣말에 가까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어휘와 말투는 종종 터프하고 직선적이었다.
그건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런 방식은 사람들에게 나를 ‘자아가 강한 사람’, ‘성격이 센 사람’으로 보이게 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억울했다.
나는 그저 솔직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들은 사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요.”
“대화 속에 내가 없었어요.”
라는 정중한 표현이었다는 것을.
요즘 가족과 전화통화를 하다 보면, 예전의 내가 들린다.
혼자 말하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화의 흐름을 스스로만 이끄는 모습.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깨닫는다.
‘ 아 , 내가 저랬구나 . 사람들이 왜 조용히 멀어졌는지 이제 알겠구나 .’
사실 나는 늘 외로웠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말을 했고,
심지어 누군가 앞에서 혼자 감정을 배설하듯 이야기하며, 마치 그걸로 연결되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안다.
타인에 의해 해결되는 외로움은 일시적이며 즉흥적이다.
외로움의 근원은 오직 나 스스로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마주함으로써만 풀린다.
말을 통해 얻은 위로는 잠깐의 위안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해결이라 믿었지만, 오히려 나를 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대화는, 말보다 침묵 속에서 자라고,
질문을 통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 때 시작된다.
이제 나는 말로만 연결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들어주는 척’하며 말로 공간을 채우고 싶지 않다.
진짜 연결은 서로의 여백을 존중하며 함께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향해 말을 쏟아냈지만,
이제는 그 외로움을 나 자신과 마주함으로써,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풀어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