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젊었을 때 바람을 피운 적이 있다. 아빠는 그때 별 말 없이 바로 엄마를 처가로 데려가셨다. 외할머니 댁에서 엄마를 딱하게 꾸짖으셨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각서까지 쓰게 하셨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모든 것을 내놓고 나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후로 둘은 그 일 때문에 다툰 적 없이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일상을 이어갔지만, 그 평화 뒤에 가려진 파도는 아빠만이 제대로 느끼고 계셨을 것이다.
나중에 제법 커서야 깨달았는데, 아빠는 많은 일을 은근히 처리하셨다. 원래 집안 돈은 모두 엄마가 관리했지만, 그 일 이후 아빠는 월급 카드를 다시 찾아오셨다. 매월 엄마에게 생활비를 건네주셨는데, 많지도 적지도 않게 식비와 잡비에 딱 맞는 금액(한 달 약 70~90만 원)이었다. 엄마도 그 후로는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정중하게 말했지, 예전처럼 그냥 가져다 쓰지 않으셨다.
매일 저녁 식사 후 아빠는 서재에서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셨는데, 문을 절대 완전히 닫지 않고 반쯤 열어두셨다. 한 번은 숙제하느라 지쳐 서재에서 종이를 좀 가져오려고 지나가다가 안을 흘깃 봤는데, 아빠가 책상등에 종이 하나를 대고 보고 계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게 바로 엄마가 썼던 그 각서였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변했고, 모서리는 닳아서 부들부들했다. 아빠는 그걸 특별히 철상자에 넣어 책장 가장 안쪽 칸에 보관하셨는데, 위에는 아빠의 옛날 사진들이 덮여 있었다.
한번은 엄마 동창회가 있어서 엄마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넘게 늦어진 밤 10시 넘어서야 들어오셨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으며 "길이 막혀서…"라고 하셨는데, 아빠는 소리를 줄인 TV 앞에 앉아 있다가 "음" 하고만 하셨다. 그 다음 날 아침, 집 현관 문 열쇠가 바뀌어 있었다. 아빠가 나와 엄마에게 새 열쇠를 건네주시며 "오래되어서 헐거웠는데, 새 걸로 바꾸는 게 안전하겠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열쇠를 받으며 잠시 멈칫하셨지만,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중학교 때, 한번은 39도까지 열이 나서 밤새 온몸이 떨린 적이 있었다. 엄마가 먼저 깨서 이마를 만져보시고는 당황해 아빠를 부르셨다. 아빠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으시며 "약 찾기 전에, 빨리 병원으로 가자"라고 하셨다. 차에서 엄마가 뒷자석에서 나를 안고 있었는데, 정신이 혼미한 중에 엄마가 아빠께 "옛날 일,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나요?"라고 묻는 게 들렸다. 아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단 아이나 봐요"라고만 하셨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아빠가 앞뒤로 뛰어다니며 접수하고 약을 받으러 가셨고, 엄마는 곁에서 나를 보살피시며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대화가 늘 나를 중심으로 오갔다. 아빠가 “다음 주에 학부모 상담이 있는데 당신이 갈래요, 내가 갈까요?” 하고 물으면, 엄마는 “제가 갈게요. 그날은 회사에 야근 있지 않나요?” 하고 답한다. 엄마가 “아이가 갈비 먹고 싶다고 하는데, 저녁에 사다가 찜을 할까요?” 하면, 아빠는 “그래요. 너무 많이는 사지 마세요. 다 못 먹으면 버리게 되잖아요.” 하고 덧붙이는 식이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다른 집 부모님들처럼 직장 일이나 이웃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기숙사생활을 시작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갔다. 어느 주말에 집에 갔을 때, 엄마가 부엌에서 밥을 하고 계시는데 아빠가 옆에서 채소를 다듬고 계셨다. 말은 없었지만, 움직임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엄마가 요리를 다 끝내자 접시를 아빠에게 건네주셨고, 아빠는 식탁에 놓아두시고는 엄마 손에 튄 기름을 닦아주셨다. 그때 문득 느꼈다, 둘 사이에 뭔가 막혀 있던 그 감이 예전보다는 옅어졌구나.
아빠와 단둘이 있을 때, 한번은 여쭤본 적이 있다. "아빠, 아직도 엄마를 원망하세요?" 아빠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원망한들 뭐 하겠니? 살아야지, 너도 아직 어린데…"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잠시 멈추시며 덧붙이셨다. "사람은 선을 지켜야 해. 엄마가 그때 그 선을 넘었어. 엄마도 잊지 않게 해야 하고, 나도 잊지 말아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빠도 마음이 안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 아픔을 꾹 눌러왔던 거다. 가족이 흩어지는 것, 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셨던 것이다.
지금은 대학에 다니면서, 영상통화를 하면 항상 엄마가 먼저 받아서 나와 몇 마디 하시고는 핸드폰을 아빠에게 건네주신다. 아빠는 받으셔서 별로 많은 말은 안 하시고, "돈은 있어?" "공부는 안 힘들어?" "몸 조심해"라고만 물어보신다. 가끔 엄마가 옆에서 "라면만 먹지 말고 좋은 거 좀 챙겨 먹으라고 전해줘"라고 말씀하시면, 아빠는 "엄마 말 들었지? 아까워하지 말고 잘 챙겨 먹어"라고 덧붙이신다.
지난번 방학에 집에 갔을 때, 그 각서가 들어있던 철상자가 여전히 책장에 있었다. 대신 위에 덮여 있던 옛날 사진은, 작년 설날에 우리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밥을 하실 때면, 아빠가 들어와서 마늘을 까주시기도 하셨고, 가끔 음식 간이 어떠냐는 이야기를 나누시기도 하셨다. 달콤한 말은 여전히 없지만, 그 고요함 속에 예전과는 다른, 서서히 따뜻해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빠는 이미 그 일을 어느 정도는 내려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단지 말로 표현하지 않으셨을 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가족을 지켜오신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