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40대 초반 엄마의 죽음과 어느 사제의 고백
우리는 언젠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100세 시대에 노인의 역할이 중요해 졌습니다. 고 2때, 40대 초반의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보낸,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된 박경철 시골의사가 전해주는 체험담을 통해 조부모와 신앙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하고 거룩한 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40대 초반에 위암에 걸렸습니다. 25년 전 3cm 단위로 촬영되는 CT로는 암의 전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주임과장은 배를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 있으면 닫고, 아니면 수술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아버지 친척들과도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였습니다.
의사는 어린 자녀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환자에게 직접 말씀을 드리자,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떡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2였던 저는 중1 여동생과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하느님,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데려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네 시간 이상 걸린다는 수술이 한 시간만에 끝났습니다. 배를 열어 보니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의사는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의사는 급속도로 나빠질 것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고민하며 병실로 왔습니다.
병실에서 초조하게 의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창밖에는 우리를 위로 하듯이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검정 교복을 입고, 엄마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서 있었습니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있는, 세 사람의 풍경을 보더니, 울컥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어머니에게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눈이 마주친 엄마는 고개를 여러 번 저으며 사인을 보냈습니다.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 텐데, 다시 병실로 왔으니 말입니다. 엄마는 암이 전이 되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엄마는 어린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안 주고 싶었습니다. 옆에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으며 사인을 보냈습니다.
엄마는 예상대로 급속하게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께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빠가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이제 엄마도 천국에 가서 아빠와 함께 너희들을 위해 기도할거야. 아빠와 엄마가 신앙 안에서 얼마나 잘 살았는지, 너희들이 잘 보았지. 우리 아들딸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잘살아야 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성서를 보시고 묵주기도를 하시고 시간이 나는 대로 성당봉사를 하셨던 어머니. 온몸으로 퍼진 암 때문에 뼈만 남아 묵주알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없으실 때도, 어머니는 묵주를 놓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가시는 날, 창밖에는 목련이 피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처럼 묵주를 들고 있는, 뼈만 남은 엄마 손을 여동생과 둘이서 잡고, 셋이서 함께 있었습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도 함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심전도가 두 세 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ㅡ뚜 하고 멈췄는데.... 엉엉 곡소리가 입 밖으로 분출하려고 했지만 ‘울지 않겠다고 엄마와 손가락 걸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습니다. 여동생도 미세하게 손과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서 울 수 없는, 우리 둘은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손과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울음을 삼키는데, 두 눈에서 눈물보가 터진 듯 눈물이 두 볼로 흘러내려 상의를 흠뻑 적시고 있었습니다. 점점 식어가는, 묵주가 들린 엄마 손을 평소처럼 동생과 잡고, 셋이서 함께 그렇게 한 참을 서 있었습니다...,
임종 직후.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 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상황을 생각했던 담당의사는 울지 않고 엄마 손을 잡고, 셋이 함께 있는 광경을 보고 ‘아이들이 엄마의 임종을 아직 모르나 보다’하며 잠시 기다렸다고 합니다.
한참 후 의사가 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가워진 엄마 손을 놓고 엄마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살을 갉아 먹는 암의 고통을 우리 둘을 위해 바치신 어머니, 왼팔로 엄마 목을 끌어안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았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다 준 엄마는 벼만 남아 아이처럼 가벼웠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추어도 귀는 마지막까지 살아있다는 생각이 났어요. 엄마 귀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뭐라고 인사했을까요...,
"엄마 사랑해요"
담당의사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봤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라는 그 마지막 고백은 이승을 떠나는 엄마에 대한 사별의 마음이고, 마지막 위로와 사랑이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 직위? 집과 땅? 그가 무엇을 했었던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졌던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사랑고백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 ‘손’이고 마지막 말이 ‘사랑해요.’라는 겁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 의사는 안동에서 항문외과의사로 경상도 지역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사제가 되어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간호사가 신부님이 오셨다고 했을 때, “거시기에서 피 흘리는 신부님이 또 오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문을 열고 나가니 얼굴이 환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신부님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빛깔이 있습니다. 피부가 검거나 흰 것은 때깔입니다. 때깔은 잘 먹고 색조 화장품으로 치장하면 좋아집니다. 그러나 빛깔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말과 행동, 나눔과 사랑, 습관과 삶의 방식들이 얼굴에 쌓여서 우러나오는 빛깔입니다. 그 사람의 빛깔, 선한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의 나눔과 사랑, 고난을 잘 이겨낸 그 사람의 연륜과 평화의 크기의 빛깔입니다, 나쁜 말과 행동, 화냄와 분노, 나쁜 습관과 생활방식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대답했습니다. 잠시 간단한 인사와 말을 주고받은 뒤,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의사는 혹시나 잘못한 게 있나 뜨끔한 눈치였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머니의 희망이었고, 다시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사제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었고, 여동생은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는, 그동안 삶의 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 사별은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봐,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 되면 어떡할까’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저희 둘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큰 버팀목,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신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느님 보시기에 잘 살아야 한다.”는 유언에는, 엄마가 염려하는 그 마음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의사는 ‘내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구나.’라는 생각보다,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의사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쁨과 향기를 삶 속에서 신앙 속에서 잘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무심코 던진 말,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말로 어떤 사람은 희망을, 어떤 사람은 상처와 좌절을 겪게 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그래서 애정과 사랑을 담은 유익한 말을 해야 합니다. 배려와 용기를 주는 말, 진솔함을 담은 감사의 말이 나에게까지 행복을 선물합니다.
누가 그 두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게 했을까요? 우리가 믿는 성인의 통공, 하늘에서 두 자녀를 위해 밤낮없이 빌어준 엄마와 아빠의 기도, 지상에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와 극진한 사랑, 두 오누이를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과 신자들이 가족처럼 챙긴 보살핌이 사제가 되고 교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다보면 뜻밖의 일이 발생합니다. 모두가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병고가 찾아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죠. 뒤돌아보는 발걸음 대부분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저 역시 잠시 뒤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모님이 자녀와 손자에게 보여주듯이 사제는 신자들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자식 둘을 남기고 떠나는 어머니와 그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막둥이 5살 때 남편을 천국으로 보내시고 막둥이 중2때 대장암으로 천국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51년 반세기 전, 막둥이 5살 때 남편을 천국으로 보내고, 날품팔이, 식당허드렛일, 가정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으신 어머니. 8남매 홀어머니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대장암에 걸리신 어머니, 고3인 저는 7교시 수업 마치고 통학버스로 집에 와서 밤마다 어머니 곁을 지키며 병간호해야 했습니다. 새벽 두 시든 세 시든 일어나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 수돗가에 가서 씻어야 했습니다. 온몸으로 퍼진 대장암덩어리 통증이 밤마다 찾아왔지만, 진통제 한 알도 못 드셨습니다. 그 당시 의술은 배를 가르고 대장에서 살점을 때어내야 하는데, 뼈만 남으신 어머니가 돌아가실 수 있다 해서 검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암의 통증이 찾아오면 자식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머리맡에 두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끙끙 앓으셨습니다. 암의 통증을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봉헌하신 어머니, 42년 전 천국으로 가시면서도 중2인 막둥이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초등4년 때 아버지, 고등3년 때 어머니를. 우리 막둥이는 5살 때 아버지, 중2 때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려서, 우리 막둥이를 생각하면 애잔하고 애뜻해서 두 눈에 가득 차오르는 이슬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떠오르면 함께 생각나는 안쓰럽고 미안한 우리 막둥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나를 사랑했던 조부모, 부모님, 가족과 친척, 교우와 친구와 이웃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이승의 삶을 하느님 보시기에 잘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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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