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엄마가 자기의 성공을 향해 달리는 삶을 살았어요. 그 시절에 장녀로 자란 엄마는 재주는 많았지만 딸린 동생 7명 건사하느라 대학은 못가고 기술자격증을 하나따서 열심히 자영업을 했어요. 성공을 하겠다며 브레이크 없는 삶을 살았어요. 제 나이 5살부터요.
성인이 될때까지 엄마는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왔고, 저 초등학교때 엄만 제가 몇학년인줄도 몰랐어요. 상상이 안가시죠? 같이 살긴살았으나, 반찬은 파출부 아줌마가 해줬고, 아침이면 저는 혼자 일어나 컴컴한 집에서 불도 안켜고 등교준비를 했어요. 피곤한 엄마는 자느라 도시락을 못싸가서 점심시간에 학교정문에서 엄마(또는 엄마 직원들)를 만나 도시락을 받았는데 그게 참싫었어요. 교실로 가면 친구들은 거의 다 먹었으니까요. 식구들과 식탁에 앉아서 같이 밥먹는 게 제 소원이었어요.
그러다가 대학가고, 엄마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자 엄마는 어이없게도 뒤늦게 제 삶에 간섭을 하고, 다른 가족과 같이 화목한 가정의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했지만, 이미 가족들은 상처투성이었어요.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냐? 그것도 아니고요, 재주는 많았지만 수완이 없던 엄마는 일을 감당이 안될만큼 벌리고 수습을 못해 큰 손해를 봤어요. 손해는 늘 아빠가 메꿨죠.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돈때문에 머리가 다 빠질 것 같은 고통을 저는 사춘기 시절부터 경험했어요.
마이너스 인생을 고집스럽개 십오년 정도 버티다가 엄마는 병이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일에서 손을 떼고, 이제는 아빠가 그토록 바라던 전업의 길을 가며 아빠의 밥을 정성스레 하고 있어요. 엄마 나이 67이에요. 엄마가 반찬을 보내주면, 어릴때 못먹었던 엄마밥이 사무쳐서 화가나더라고요. 일년정도는 거부했었어요.
그러다가 요새 엄마가 농사에 취미를 붙이고 열심히 농사에 매진하며 그 농산물로 가족들 밥을 해먹이는 낙으로 살고계세요.
그 농산물에 없는 게 없이 파 마늘 양파 토마토 상추 깻잎 방토 호박 고추 비트 머우 수박 당근 가지 양배추 적양배추 고구마 감자 옥수수, 한 3-40평 되는 땅에 야무지게도 심어서 잘 가꾸고 나눠주시는데,
이제 더이상 성공이라는 헛된 꿈을 꾸지 않고, 땀흘린 것으로 먹고 사는 삶을 사는 엄마를 이제는 응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열매는 저도 감사히 먹고 있어요.
초록마을 같은데서 비싸도 유기농 위주로 사먹다가 엄마가 무농약으로 키운거 맘편히 거저 먹을수 있는게 좋더라고요. 한없이 가져다 주시는데, "엄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니까 나도 맘껏 달라고 할 수 있어 좋아요.
그런데, 좀만 더 빨리 이런 날이 왔었다면 좋았을 뻔했어요.
저는 이미 마음에 상처 투성이고, 너무 많은 트라우마룰 끌어안고 사느라 힘들어요. 일주일에 한번은 엄마와 관련된 악몽을 꾸곤해요.
가까이도 먼 엄마때문에 지독히 불안하고 외로웠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지금도 살아서, 이제라도 받는 몇가지 농작물에 좋아하는 거 보면 좀 슬퍼요.
그리고 그거라도 줘야 마음이 편한 엄마를 보는게 아직은 좀 불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