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세자매가 유럽 여행 간다고 글 썼는데
댓글에 후기 들려달라는 분도 있었고 해서 글 올립니다
그리고 며칠전 최악의 유럽 여행을 하신 분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여행은 날씨만 빼고는 다 좋았습니다
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3812239
비즈니스석에 타자마자 음료수 서비스에 이어 테이블에 흰 테이블보를 깔고 코스 요리가 나오고
기분 만점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옛 성을 개조해서 만든 운치있는 호텔에서 2박을 하고 좋아하는 치즈와 피자를 끼니마다 먹으며 이때다 싶어 와인도 점심 저녁으로 마시고 오래간만에 뭉친 세자매는 신이 났습니다
세느강을 유람선으로 도는 시간에 비바람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사진도 예쁘게 찍지 못했어요
거대한 루브르 미술관에서 아주 작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중점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짧은 일정을 가진 건 너무나 아쉬웠구요
그건 바티칸 박물관도 그렇고 성베드로 대성당도 그렇고 들어가서 본 게 어디야 할 정도로 여러 곳을 도는 패키지니 충분히 이해가 가구요 자유시간에 베네치아에서 한 번 로마에서 한 번 내부 구경을 한 것은 참 잘 했다 싶구요 마음도 지갑도 넉넉한 막내 동생 덕에 영화 속 같은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어요
그 유명한 제네바가 소박한 작은 도시임에 놀라고 떼제베를 타고 제네바역에 내리자 역 앞에 한글도 선명히 ㅇㅇ투어라고 쓰여진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감격했습니다
스위스에서 2박은 산 속의 호텔도 운치있고 음식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겨울에도 거의 오지 않았다는 눈이 엄청 내려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융프라우는 그냥 유리창 너머로 쌓인 눈만 조금 보고 맙니다 ㅠㅠ
신록과 들꽃 위에도 눈이 수북히 쌓이구요
산에 오를 때 한나절 입으려던 경량 패딩을 3일이나 입게 됩니다
대망의 베네치아에 가서도 춥고 비바람이 쳐서 그림같은 풍경은 커녕 사나운 파도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패딩과 목도리와 장갑을 끼고 알록달록한 일회용 비옷을 입고 세자매가 찍은 사진은
지금 다시 봐도 폭소를 자아냅니다
좋아하는 배우 리차드 매든을 따라가면서 본 메디치 가문을 그린 마스터즈 오브 플로렌스
다이안 레인이 주연을 한 투스카의 태양 아래서 등등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보고 동경하던 이탈리아와 피렌체는 지금이라도 또 다시가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습니다
피펜체를 구경하고서야 겨우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토스카나의 예쁜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피렌체와 로마를 가이드해준 현지 가이드가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가이드가 말하길 여행 온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 분들 중에 아직도 중세의 암흑속에 계신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를 르네상스 세자매라고 불렀어요
제가 그랬죠 나는 아직도 중세 암흑기에 있을지도..
그러자 가이드가 "이런 색 옷을 입은 분이 암흑기일 리가 없죠"
이런 색 옷..
20년도 전에 미국에 갔던 남편이 사다준 쨍한 민트색 가디건
주로 칙칙한 옷만 입던 터라 한두번 입고 서랍 깊숙히 처박혀 나오지 못 했던
수많은 이사를 하면서도 왠지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던
문득 볼 때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입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다가 유럽 여행을 간다니 이때 안 입으면 언제 입으리 하고 들고 갔던
남편을 잃고 더더욱 어두운 옷만 입고
안으로만 처박혀 캄캄한 터널 속 같은 시간들 속에서 그야말로 암흑기를 보내고
조금씩 밖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도 들고 취미도 가져야겠다 생각도 들 즈음
코로나가 터지고
그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가이드가
내게 이제는 르네상스가 왔다고
나는 이제 암흑기가 아니라고
환하게 살라고 선언을 해 준 것만 같아요
아! 쨍한 민트색 가디건을 입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환하게 웃는 세자매의 사진은
솜씨 좋은 가이드 덕에 인생샷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