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내리쬐는 6월의 어느 오후에
6살짜리 여자아이가 땀을 빨빨 흘리며
대문간옆 감나무 그늘 아래에 퍼지르고 앉아서 목이 쉬도록 울고 있으니까
쪽진머리의 그 아이 할매가 옆에 와서 아이를 달래봅니다
" 너그 엄마가 또 니만 나두고 나갔는 갑제
자꾸 울마 목 쉰다 고마 뚝하고 내 따라가자 눈깔사탕 한 개 주꾸마 "
70년대 초반의 귀하디 귀한 달달한 눈깔사탕의 유혹에 혼자 남겨진 서러움도
잠시 잊을수 있었던 그날의 이 장면이
6살 여자 아이가 환갑을 앞에 둔 지금까지도 생애 첫 장면으로 기억하는
저와 그리운 할매의 모습이랍니다.
그 여섯살 여자아이가 바로 저
부모님도 계시고 언니도 동생도 있지만
그 시절 엄마는 저는 집에 두고 다른 형제들만 데리고 저렇게 외출을 하시면
저는 또 따돌려졌다는 서러움에 자주 저렇게 울었었고
그래서 제 생애 첫 장면이 좀 슬프게 떠올려지곤 한답니다.
특히나 오늘은 할매가 보고 싶고 생각이 나서
남편 먼저 자라고 하고 저는 이러고 있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엄마는 그립지도 않았고
가끔씩 할매가 많이 그립습니다. 보고싶습니다.
울 할매는
1900년생이셨는데
경상도 시골 부농의 집 딸로 태어나셨고
남자 형제들은 글공부를 할 수 있었어도 딸들한테는 글공부를 시키지 않으셨다고 해요
그런데도 울할매는 남자 형제들 어깨너머로 한자도 언문도 다 익히셔서
그 시절 울동네서 신문을 읽으실 줄 아는 몇 안되는 어른이셨어요
위안부 가지 않을려고 급하게 혼인하느라 4살아래 할배랑 결혼을 하셨고
결혼생활 중 아들만 8면을 낳으셨대요
그런데 보릿고개 홍역등으로 5번째 울 아버지 밑으로 형제들은
어릴 때 다 떠나보내셨다고 해요
당신이 딸로 태어난게 항상 불만이셨던 울 할매는
아들손자에게만 방금 낳은 달걀을 챙겨 먹이고 다른 좋은 거 챙겨주시면서도
손녀딸들은 손자들하고 차별을 좀 하셨던거 같아요 특히 먹는걸로 ..
그렇지만 공부잘하는 손녀딸들 안스럽게 보시기는 했어요
여자는 공부 암만 잘해도 남자들만큼 출세 못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도 언니에 이어 제가 대학갈때는 울 동네에서 남자들도 대학못보내던 시절이니까
계집애들 둘 씩이나 대학보낸다고 손가락질하고 부도맞을거라고
동네 사람들 수군대도 울할매는 아무말씀도 안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