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5시쯤 간단히 저녁을 해치우고 책보며 제 방에서 놀던 저는 날이 어두워져서 저녁으로 뭘 먹을지 물어보러 거실로 나가봤더니 이미 남편은 저 모르게 주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잡수시고는 설거지까지 완벽히 끝내고 책방으로 사라지고 남편과 라면이 사라진 빈 주방엔 라면 냄새만이 소리없이 감돌고...
그럼 엄마꺼만 드리면 되겠네 생각하며 엄마방에 가서 물어봤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치매라 혼자 사시는게 마음이 안 놓여 같이 산지 2년여...
"매일 드시던 밥 드실래요? 아님 간만에 라면 드실래요?"
살림을 합치고 2년 동안 라면을 한번도 못드신 엄마는 제가 질문을 마치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라면!!"이라고 골든벨 외치는 여고생마냥 하이톤으로 외치심 ㅎㅎ
그런데 먹는 얘기라면 귀밝은 남편이 라면 낙점 소식을 방문 너머로 듣고 뛰어나와서는 라면 못 끓이기로 소문난 저를 제치고 냄비를 가로채고는 룰루랄라~하며 이 라면(스낵면)은 면발도 가늘고 오래 끓이면 안된다며 나름의 물양과 끓이는 시간, 계란 투하하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제가 조수를 하고 남편이 끓여 쟁반에 담고 디저트로 빛고운 주황색 감을 곁들여 엄마방으로 들고감
사위가 손수 끓인 라면이라고 강조를 하며, 귀한거니 불기 전에 드셔야돼, 얼른 잡솨봐~ 하며 장모를 닥달 ㅎㅎ
(희한하게 딸인 저는 친정엄마한테 존대말을 쓰고 사위인 남편은 말을 놓는 이상한 우리집^^)
엄마는 "우리 사위가 끓였다고? 돈주고 못사먹는 라면이네!"하시며 후루룩~ 한젓가락 드시더니 요즘 라면 왜 이리 맛있냐고, 면발은 가는데 쫄깃하고 맵지도 않고 고소하고 간도 딱 맞는다며 탄성에 탄성을.. (2년여 라면 금욕생활의 엉뚱한 효과 ㅋ, 스낵면 광고 아님)
감 하나 입에 물고 옆에서 평을 기다리던 남편이 그 얘기 듣고는 씩~ 웃으며 "잊지 마셔. 사위가 라면 끓여드린거" 한번 더 확인사살 후 기분좋게 감을 오독오독 씹으며 방을 나가는데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것이 양쪽에 애 하나씩 얹혀놔도 끄덕없겠더라는..^^
비상식량으로 쟁여놨던 라면의 존재 이유를 체험한 저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