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넣어 수정했습니다.
223.38님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아버지는 구 씨를 자기 분신처럼 여겼던 것 같아요.
그들은 많이 닮았는데 특히 두 사람 다 돈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죠.
어렸을 때의 가난이 거의 트라우마처럼 자리잡은 사람들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두 사람 다 아주 소중한 걸 잃어버리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왜 이토록 융통성 없이 살게 되었을까 아버지의 과거가 궁금해 한 번 써 보았습니다.
----------------------------------------------------------
< 산포 염제호 씨 이야기 >
곤궁했다.
가게 동업자가 야밤도주를 한 후 빈털털이가 된 아버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까지 되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행상을 시작하시고 나는 공고로 진학해 기술 배워 사는 늘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1년 만에 행상을 그만 두시고 아버지, 제옥이와 시골 외삼촌 집에서 더부
살이를 시작했다.
밥만 얻어먹고 사는 것 만으로도 감사했지만
누구 하나 용돈 주는 사람이 없어
공고를 다니며 저녁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아버지 약값에, 제옥이 문제지, 옷이랑 신발도 사 주고 조금씩 돈을 모았다.
졸업한 후 취업해 드디어 월세방을 얻고
고등학생이 된 제옥이와 같이 살게 되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제옥이는 나랑 다르게 야무지고 제 몫 잘 찾아 먹는 게 다행이다.
그래도 이 녀석이 뜨신 밥이라도 해 줘서 아침밥 먹고 출근하고
사람 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제옥이도 취업해 집을 나가고 나도 가구 공장엘 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뭐라고 할 말도 없고 그냥 일만 주구장창 하는 나를
여기 공장장님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다고 칭찬하시고
자꾸 누구를 소개 시켜 주신다고 한다.
나도 이 공장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미스 곽이 있어서 더 좋았다.
월급날이면 친절한 미스 곽이 활짝 웃으며
예쁜 글씨로 ‘염제호’라고 써진 봉투를 건네는 게 왜 그렇게 쑥스럽든지.
점심때면 같이 밥 먹다 눈이 자꾸 마주쳐도
따로 이야기 한번 없이 반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미스 곽 생일이라고 여직원들끼리 약속을 잡는 걸 들었다.
다음 날 고민고민하다 백화점에서 산 스카프를 건넸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래도 기정이, 창희 낳고 어머니, 아버지까지 모시고 사니
이제 나도 번듯한 가정을 꾸렸다 싶어 마음이 넉넉했다.
위태위태하시던 아버지 건강도 더 좋아지셔서 이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미정이를 낳던 해, 제옥이네 가게가 망해
보증을 선 내게 연체 빚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원금만 3억이 넘는 빚을 갚느라 그때부터는 전쟁 같은 하루하루였다.
퇴직금까지 보태도 빚을 못 갚아 산포로 이사하고 씽크대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옆에서 자는 밤이면 몸은 천근만근인데 잠은 안 오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당장 돈을 벌어야 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때,
방학 때 겨우 한 번 내려가면 따라온다고 울던 제옥이를 달래 용돈 쥐어주며
혼자 버스 타고 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까 봐, 우리 애들이 그런 처지가 될까 봐 두려워
아끼고 더 아꼈다.
어머니가 나서셔서 집 앞 텃밭에다 이것저것 심으시고
애들 옷은 처형 애들 입던 거 물려 입으니
먹고 사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데
윤서방 빚 갚고 아버지 약값, 치료비에, 씽크대 만들다 돈을 떼이기도 하느라
나들이 한 번을 못 가보고 3남매를 키웠다.
제옥이네 빚을 다 갚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애들은 무던하게 자라 제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동안 조금씩 사 둔 밭을 놀릴 수가 없어 밭일하랴 공장 일하랴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지만 이제야 돈이 좀 모이는 것 같아 살맛이 난다.
그렇게 결혼하고 35년을 살았더니
애 엄마는 20년을 시부모님 모시고 살며 공장에 밭일까지 하느라
무릎 인공 관절 수술을 한 후 몸 놀림이 예전 같지 않다.
씨만 뿌리면 뭐라도 열리는 밭을 그냥 놀리자고,
일에 미친 양반이라며
하루가 다르게 힘들다고 푸념이다.
애 엄마가 공장 일은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도 성화라
고민 끝에 옆집 사는 구 씨한테 한번 말이나 해 봤다.
다행히 하겠단다.
지난 겨울 소라 할머니네 집 연세로 들어 왔다더니
매일 술만 마셔대서 일이나 제대로 하려나 했는데
이 사람 진국이다.
쓸데없는 말 없이 할 일만 딱 하는 스타일인데
일도 잘 배우고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어느새 알고 연장을 가져다주고 목재를 잡아주는 게
보통 눈썰미가 아니다.
게다가 9시까지 나오면 된다고 해도 늙은이 혼자 일 하는 게 짠했는지 7시면 나오고
밥상머리에서 밥 먹는 걸 봐도 예의범절도 반듯하고 책임감도 있다.
창희는 손재주라곤 1도 없어 시키면 목재만 버리는데다
말이 말이 너무 많아 같이 일하면 귓구멍에서 진물이 나는 것 같은데
과묵하고 일 잘하고
구 씨는 꼭 젊었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어디 가서 뭘 해도 성공했을 사람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막내가 그 집에 반찬 심부름 다니더니 구 씨를 쫄래 쫄래 따라다닌다 .
어라, 붙임성이라곤 없는 녀석이.......뭐지?
그런데 주급을 준 날, 구 씨가 미정이 전화번호를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 줬다.
둘이 사귀는 걸 보니 숫기 없는 것도 책임감 있고 눈썰미 있는 것도 비슷하니 잘 만난 것도 같고
방 한가득 차 있던 술병들도 정리하고 이제 술 끊으려나 싶다.
요새 젊은 애들은 게임에 미친다던데
매일 술 마시면 산만 들여다보고 있고 주사도 별 게 없다.
가만 보면 후줄근한 티셔츠 쪼가리만 입는 게 옷사치도 없고
심지어 공병도 그냥 안 버리고 가져다 파는 데다
어중이떠중이 다 사는 차 한 대 없는 걸 보니 경제 관념도 있어 보인다.
가진 건 없어 보여도 나중에 내 공장만 물려받아도
우리 미정이 맘 편히 살게 해줄 깜냥은 되겠지 싶다.
애 엄마는 뭐 하던 사람이냐고 자꾸 묻는데 낸들 아냐고.
아이구.......계획도 없이 당장 몸 힘들다고 또 대출 받아 차나 굴리려는 창희 보면 답답한데
구 씨 반만 닮아라 이눔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