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 모든 것이 고정적이지 않고 변하는데 풀어야 할 전생의 업이 있을까요?
1. ㄱㄷㅈㄱ
'22.6.1 11:30 PM (58.230.xxx.177) - 삭제된댓글업보는 자신이 지은 죄에요
업보는 생이 여러번 계속되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죠.업장소멸
그냥 사는 생에서 죄짓지 않고 착하게 성실히 살면서
버티는거에요
그러면 업이 소멸되고 내생에는 지금보다
나을거라고 믿는거죠
꼭 내생을 믿지않아도 죄짓는것보다는 착하게 사는게 좋은거죠
저는 어릴때 절에 다닐때 주위들은거라 제대로 아는건 아니에요
대략 저런뜻 아닐까 생각해요2. 000
'22.6.1 11:36 PM (124.50.xxx.211)모든 것이 변하고 고정된 것이 없는데 왜 업은 몇생을 거듭하는 동안 계속 고정된 상태로 소멸될때까지 있는 건가요?
나쁘게 살아도 괜찮다- 라는 말이 아니고요. 업이라는 것 자체도 기독교의 원죄설과 같은 것 같아요. 통치하기 위해서 원래 깨달음과는 다르게 변질된.3. wsc
'22.6.1 11:37 PM (65.93.xxx.68)석가가 제행무상을 주창한 것은 당시 인도에 만연해 있던 '힌두'에 대한 반기입니다.
힌두에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 궁극의 진리를 찾았고, 이를 '브라만'이라 불렀죠.
그리고, 이 브라만이 개인에게서 발현되는 것을 '아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행무상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제법무아 입니다. 여기서 '아'는 아트만의 음역...
석가는 절대 불변의 진리를 찾는 힌두교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신분제도를 비판하는 시각이고, 이게 초기 불교의 흥행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석가 역시 '힌두'의 문명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생' 같은 힌두 요소들이 혼재하고 있는 거구요.
엄밀히 말해 '제행무상' '제법무아' 라고 한다면, 전생의 업보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남아있는 불교는 초기 석가의 가르침 + 힌두 + 중국 도교(선불교) 가 왕창 짬뽕된 불교라서
같은 교리내에서도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죠.4. wsc
'22.6.1 11:43 PM (65.93.xxx.68)"통치하기 위해서 원래 깨달음과는 다르게 변질된...."
=> 이것은 놀라운 통찰이구요. 이는 비단 불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심지어 유교에서까지도 나타나는 현상이구요. 그렇다고 그것을 나쁘게만 비판적으로 볼 것도 아니구요. 종교 자체가 원래 그런것이고,
원래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것입니다.
애초에 '힌두'가 발흥한 것도, 아리안이 드라비다족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었습니다.
'너희는 언제나 노예야. 우리 아리안은 항상 주인이야. 이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 말고, 노예의 본분을 다하라.. "
석가는 웃기지마라. 불변의 진리가 어디있느냐. 너희 아리안이 노예가 될 수도 있고, 드라비다가
주인이 될 수 도 있다.
너희의 삶이 너희의 삶을 결정한다. (인과론).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5. 원죄랑 업보랑
'22.6.1 11:59 PM (116.41.xxx.141)국가에 충성이랑 결국 다 같은말 국가종교의
디폴트같은거겠죠
결국 절대자 상정해놓고 빚으로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그 빚담보를 절대 갚을수없는 구조로 옭아매는거죠 뭐~~
요새도 전생이랑 윤화항 업보랑 제행무상이랑
도돌이하면서
검은 백마 ㅡ같은 형용모순 덩어리 단어들 떠드는 사람들보면 답답하더군요 원글님 느낌처럼..
죽어서가는 하나님나라 믿고 떠드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고 ...
업보라는 일종의 백업이라는건데.. 한 일생을
그 평생을 어찌 cctv처럼 녹화기록해서 쭉 데이타화해서 또다른 새생명에게 그걸 적용시킨다는게 말이 일단 안되는거죠
그 아이덴티티라는게 고유한 어떤 코어가 있나요
시대와 환경과 인종 외형은 다 다르지만 바코드를 찍으면 하나의 아디덴티티였다..
이런게 말이 안되지않나요...6. ...
'22.6.2 7:13 AM (1.232.xxx.237)“윤회하는 것은 없지만 윤회는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
해 준다. 위에서 든 (3)의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 먼저 어두운 방에 여러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모양이나 크기 또 색깔이 모두 다른 여러 개의 초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불을 붙여 본다. 이 촛불은 여러 시간을 타다가 꺼져갈 것이다. 이것이꺼지기 직전에 그 촛불로 다른 초 하나를 켜고 원래의 촛불은 자연스레 꺼지게 내버려 둔다. 이 두 번째 촛불도 여러 시간 후 꺼져갈 무렵 셋째 촛불을 켜게 하고 꺼지게 둔다. 이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서 여러 다른 촛불은 여러 다른 생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각양각색으로 다른 여러 (고뇌로) 타오르는 촛불(삶)들 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불변하는 주체가 있을까? 어떤 실체(實體, substance)가 존재하고 그것이 이 모든 다른 촛불들에 옮겨다니면서 없어지지 않고 변치도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할까? 아니, 그런 것은 없다. 각각의 촛불은 모두 다른 초들이 타면서 생긴 다른 촛불들이고, 촛불이 번뇌의 비유라면 그 번뇌도 다른 삶들이 가진 다른 번뇌들이다.7. ...
'22.6.2 7:25 AM (1.232.xxx.237)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식의 전생은가능하지 않고요, 다만 어껀 영향력이 이어지는 것인데, 어떤 사람의 사람의 인생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주변조건, 그중에서도 심리적 버릇 등으로 인해 생긴 사건 등을 업보라고 지칭해서 말한 거 아닐까 합니다. 붓다는 미래적으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중에 어떤 영향력으로 나타나니 지금의 행동에 주의를 해야한다는 걸 전하려 했는데
사람들이 과거의 영향력을 가지고 현재 사건의 인과를 밝혀내는데 촛점을 잘목 맞추었다고 하더라고요.8. 오호
'22.6.2 10:36 AM (223.62.xxx.231)제행무상 댓글 마음에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