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펌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는 xx들에게.....

조회수 : 1,959
작성일 : 2021-10-27 03:07:28


((베플삥은 아니고 쪽바리들에게 응당받아야할 돈이였고 열배 백배로 더 받았어야 했는데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프레이저보고서에 보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돼지를 키워 수출하겠다 토끼털을 팔겠다등등 미국의 정책과 상반되는 정책을 펴다가 미국이 당장 경제관료를 교체하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모든 원조를 끊겠다 라고 협박아닌협박을 하니



당시 미국원조에 많이 의지했던 박정희는 깨갱하면서 꼬리를 내리고 미국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였는데 경제가 살아나고 국민들의 찬사가 이어지자 현장을 돌아다니며 본인 업적인양 사진찍고 연설하고 떡도치고



암튼 그 행동들이 뇌리에 깊게박힌 틀딱들은 아직도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를 살렸다 생각하니 아이러니 합니다))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470373/2/4





이번 누리호발사에 문재인은

숟가락만 얹었지 한게 뭐있냐

라는 부모말에

박정희는 가서 삽이라도

들고 가서 일했냐 그사람도

숟가락얹었네요 라는 아들의말에

부모님이 입을 다물었다는 글

생각이 나네요












IP : 211.207.xxx.10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1.10.27 3:25 AM (106.102.xxx.183)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우리나라 부국 대통령으로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5월 20일에 적은 휘호인 ‘내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인터넷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에 빠진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고자 시간을 내어 집필하게 되었다. 본 글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로 구성되었으며, 보다 정확한 출처를
    1. 대한민국 최초의 주민등록증 제도 실시

    - 1968년 11월 21일에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주민등록증 제도가 실시된 계기는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1.21사태, 즉 김신조를 필두로 한 북한의 남파공작원들이 청와대까지 습격해 들어오자 그 뒤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을 시도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군 복장에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하지만 자하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정부는 전국민에게 단일 형태의 신분증을 나눠주어 필요할 때 신원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취지로 만들었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남파 간첩 등의 불온분자 색출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차원에서 발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신분증 제도는 존재했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주민등록증 제도의 전통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이전에 있었던 시민증과 도민증은 폐지되었다. 주민등록증의 첫 발급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68년 10월 말부터 전국민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고, 11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주었다.



    2. 친노동계급적인 서민을 위한 최초의 의료보험제도 실시

    - 우리는 흔히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노동자들의 인권을 억압한 독재적인 시대로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료보험, 산재보험과 생활보호 등 소위 친노동계급적 성격을 가진 제도들이 노동운동에 대해 억압적이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 도입되었다.



    특히 1976년 의료보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강제가입방식의 의료보험제도는 당시 재정적 부담을 우려한 경제기획원 등 정부 내 핵심 부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었는데,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크게 작용했다. 즉, 1972년 유신개헌 이후 학생, 종교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체제 운동이 격화되면서 사회 안정 대책이 시급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1973년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한 이후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무상 의료 시스템을 선전하자 당시에 북한과 경쟁을 벌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에 자극을 받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국민연금은 경제 상황의 악화로 무기한 연기된 대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된 배경에는 일정한 기여금 납입 기간이 필요한 연금과 달리 시행 즉시 국민들에게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私)보험에 의존하고 있어 보험혜택을 못 받는 이들이 4700만명에 이른다. 맹장수술비가 1만 5000달러나 되고, 안경 맞추려면 안과 시력검사비로만 60달러를 내야 한다. 미국 시벨리우스 보건장관은 한국의 의료보험을 배우고 싶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싶어한다. 번번이 의료보험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3. 친환경적인 그린벨트 설치로 산림을 보호하여 세계 4대 조림성공국의 반열에 오름

    -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로 서울 외곽지역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가 처음 지정됐다.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를 따라 폭 2∼10㎞ 지역의 서울, 경기 땅 454.2㎢(첫 발표 때는 467㎢)의 개발을 묶는다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목적이었다. 그린벨트는 박정희정권 당시인 1971년부터 시행되어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난개발을 방지하는 중요한 방어책이 되어 왔다.



    그린벨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전 국민이 수혜를 얻는다. 정부는 당시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관보에만 실어 밀실행정을 행했다. 불만이 많았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 관리근거가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불과한데도 이를 개정할 때는 반드시 사전 재가를 받도록 해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정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공사례로 남았다.



    건설부 고시 447호로 발표된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의거해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서 반경 15km 라인을 따라 폭 2~10km 구간이 '영구 녹지대’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의 80%가 사유지였다는 점이었다. 이후 그린벨트 지역은 모두 8차례에 걸쳐 서울을 비롯 부산, 대구, 광주 등에 이어 1977년 4월 18일 마지막으로 지정된 전남 여수시 일대까지 합쳐 전국적으로 총 5,379㎢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전 국토의 5.4%나 되는 엄청난 땅이었다. 심지어 그린벨트 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 개를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린벨트는 박 대통령 생존시 단 한 번의 구역변경 없이 철저하게 그리고 강압적으로 관리되었다. 그린벨트를 잘못 관리한 공무원은 가차 없이 징계를 받았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26명의 공직자가 관리부실로 파면, 감봉, 견책, 직위 해제 등의 징계를 받았다.



    또한 그린벨트임을 알리는 푯말을 세우고, 경비행기로 항공사진을 주기적으로 촬영하여 과거의 사진과 비교, 무허가로 들어서는 건물이나 용도가 변경된 토지를 적발하여 원상 복귀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이 있어 그린벨트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성공한 자연환경보전 사례의 하나'로 꼽히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은 '후세에 찬란한 자연유산을 물려준 지도자'로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4. 학원-과외 전면금지 조치를 통해 계층의 대물림 현상을 완화하여 교육의 평등을 실현

    - 보건사회연구원 여유진, 김문길 연구위원과 장수명(교원대), 한치록(고려대) 교수가 공동 발간한 '계층구조 및 사회이동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직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아들이 역시 상위직종을 가진 확률은 53%였다. 반면 하위 직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아들이 상위직종을 가진 확률은 29%였다.

    부자(父子)의 직업정보가 있는 한국노동패널 6,466명을 분석한 결과 상위직종은 전문가ㆍ30인 이상 고용주ㆍ준전문가ㆍ공무원ㆍ중간관리자ㆍ화이트칼라(사무원)로 분류했고, 하위 직종은 영세자영업자ㆍ농부ㆍ숙련근로자ㆍ미숙련근로자ㆍ농업근로자로 분류해 직종을 이분화했다.

    이런 계층의 대물림 현상은 과외금지 기간에 중ㆍ고교를 다닌 세대(1961~1985년생)에서 대폭 줄어들었다. 과외허용 세대의 경우 상층 출신과 하층 출신이 상층으로 귀착한 확률은 각각 41.9%, 17.9%로 그 차이가 23.9%포인트나 된 반면, 과외금지 세대는 각각 58.3%, 41.7%로 그 차이가 16.6%포인트에 불과했다.



    즉 과외금지 세대는 과외허용 세대보다 7.3%포인트 만큼 더 계층간 이동이 활발했다. 과외금지 세대에 상층으로 올라선 비율이 전반적으로 높은 이유는 이 시기에 화이트칼라 직종이 늘어났기 때문이지만, 하층 출신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상층으로 올라간 것은 과외금지로 교육기회의 소득의존도가 낮아진 결과라는 뜻이다.

    연령대별로 따지면 1976~80년생의 계층간 이동이 가장 활발했다. 하층 아버지를 뒀을 때 아들이 상층이 된 비율보다 상층 아버지를 뒀을 때 아들이 상층이 된 비율(오즈비ㆍodds ratio)이 1.66배 높았을 뿐이다. 1971~85년생은 줄곧 1점대 배율을 유지해 계층간 이동이 활발했지만, 과외금지가 풀린 1986년생 이후로는 다시 2.44배로 높아졌다.



    5. 1979년에 88 올림픽 유치를 위한 계획을 수립 및 구성

    - 대부분의 사람들은 88 올림픽 유치가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사실 88 올림픽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부터 준비 작업을 해왔던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9년 10월에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한다. 그런데 그 뒤에 한 달도 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했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9년 후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특히나 주목할 것은 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IOC헌장에 따라 인종 및 종교와 정치상의 이유를 불문하고 전체 IOC 회원국 선수와 임원들에게 자유입국을 허용, 모든 선수들이 아무런 제한이나 차별없이 참가할 수있도록 보장할 것이며 경기종목도 빠짐없이 모두 실시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에 있겠다. 즉, 소련과 중공은 물론 북한 등 미수교공산권에 대해서도 입국을 허용한다는 말이었다.


    6. 미국 브로드웨이에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외국인으로서 환영을 받는 카퍼레이드를 행함

    - 1965년 5월 19일, 뉴욕시가 주최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일대에서 하는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 퍼레이드는 일명 '영웅행진'이라고 불리우는 퍼레이드로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광의 카퍼레이드였다. 이 흔적은 지금도 미국의 브로드웨이 길거리에 남아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퍼레이드 흔적을 바닥에 문구와 함께 석판으로 새겨놓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맥아더 원수, 드골의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달착륙 우주인들이 이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한인으로서 이 뉴욕시 영웅행진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첫 번째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2번째 한국인으로서 영웅행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홍수와 가뭄, 환경을 대비해서 4대강 다목적댐 준공


    - 박정희 대통령은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을 실시했는데, 홍수와 한해(旱害)를 겪으면서, 유사 이래 계속된 이와 같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강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과 같은 큰 강에 댐을 만들고 작은 강에는 보(洑)를 지어 집중 호우 때에는 물을 가둬 수해를 줄이고 갈수기 때에는 물을 풀어야 한다고 봤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시행했던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시발점은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유역 개발사업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지방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 때처럼 반발하는 국민들보다 오히려 반기는 국민들이 더 많았다.



    물을 다스려 국민이 살기 좋게 하는 것이 위민(爲民)정치의 시작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 지방에 사는 처녀들도 도회지 처녀들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변에서 데이트를 하고 물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농촌지역의 학생들도 도시 어린이와 똑같이 뱃놀이를 하고 안전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모든 국민이 잘사는 복지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의 중점적인 이유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고통과 피해를 줄여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렇듯 홍수와 가뭄, 환경을 대비해서 4대강 다목적댐을 준공했던 것이다. 예컨대 1972년 11월 '동양 최대의 사력(沙礫)댐'으로 소양강댐이 선전되었다.



    소양강댐은 1967년 4월 15일 착공되어 1973년 10월 15일 완공되었는데, 이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3대 국책사업으로 꼽혔다. 이 사업을 맡은 정주영 회장은 비용을 3분의 1로 낮추면서도 훨씬 튼튼한 사력식 공법을 제안하여 실행에 옮겼다. 소양강댐 이외에도 안동댐, 대청댐 등도 만들어졌다.



    8. 제주도의 명물 감귤사업을 조성하고 도로, 항만 등 국제적인 관광지로서의 입지를 구축

    - 현재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임과 동시에 제주도의 특산물로 대표적인 명물은 바로 감귤이다. 우리나라의 여느 지역들과는 달리, 제주도의 귤은 한라봉이라고 매우 크면서도 맛이 일품이다. 이런 제주도의 감귤사업과 관광지 조성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바로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정책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같다.



    외국인 상대관관산업이 수출보다 외화가득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제주도에 들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국제 관광지로의 개발할 결심을 하고, 청와대비서실에 제주도관광종합개발 계획의 입안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국내 신혼여행지에 머물러 있던 제주도에 1천억 원의 투자를 지시한다. 그 뒤에도 1976년에 5백억 원을 투자하였고, 80만 평의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다.



    이외에도 5·16도로 개설, 어승생 수원지 건설 등 제주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과 제주도의 인연이 깊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시절 제주도관광종합개발계획을 입안했고, 이를 토대로 서귀포시에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다. 또한 먹는 물이 부족했던 제주에 어승생 수원지를 만들어 '수돗물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계획들은 1961년 9월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초도순시차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 계획되었다.



    일정을 연장해가면서 제주도의 실정을 샅샅이 살펴본 후 미개발 자연자원과 민속 등을 자원으로 한 관광개발, 광활한 초원을 활용한 축산, 그리고 따뜻한 기후에 적합한 감귤재배를 진흥시켜 제주도를 개발하고 제주도민의 소득수준을 전국 시 도의 중위권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을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어 박정희 의장은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가진 시국강연회에서 가장 시급한 해상교통의 개선책으로 악천후하에서도 제주해협을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의 필요성을 강조한 후 3만여 명의 도민들에게 제주-부산, 제주-목포 간 대형여객선 투입을 약속하고 제주개발계획을 천명했다.



    서울로 돌아오자 마자 내린 박의장의 지시에 따라 조달청은 제주항로에 대형 여객선을 건조, 투입시키기 위해 이를 국제입찰에 붙였다. 입찰 결과 일본의 조선소가 낙찰되고 63년 10월 12일 역사적인 취항을 하게 되었다. 이 배가 바로 제주-부산 간에 취항했던 890톤급의 도라지호이다. 이보다 두 달 앞서 정부는 국고보조로 국내에서 건조된 514톤급의 가야호를 제주-목포 간에 투입, 운항시켰다.



    제주와 부산 그리고 목포를 잇는 대형 여객선 취항과 더불어 제주의 관광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기반조성사업의 하나는 62년에 기공해서 63년 10월 11일 개통된 제주-서귀포 간의 제1횡단도로(5.16 도로)의 건설이었다. 이 5.16도로는 제주도의 경제발전과 관광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4시간 30분이나 걸리던 제주-서귀포 간 자동차 운행시간을 1시간으로 단축시켜 제주도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해상운송에 있어서는 77년 4월, 3천 톤급의 카페리 1호가 취항했다. 두 달 뒤인 같은 해 6월 3천 톤급 카페리 2호가 같은 노선에 취항해 바야흐로 여객선의 대형화, 수송의 대량화, 여객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제주항의 건설은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7년부터의 제2차 5개년계획 그리고 72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계획에 지속적으로 책정되어 꾸준히 추진되고 있었다.



    육상교통과 수송을 위한 도로건설에 있어서는 5.16도로(제1횡단도로) 이외에도 일주도로 중산간도로 및 1,100도로 등 총 4개 국도가 박대통령의 지시로 건설되고 재임 중에 개통되어 전국 15개 시 도 중에서 교통망이 가장 잘 발달된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제주도의 관광지 조성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1964년 2월 연두순시차 제주도에 들린 박대통령은 제주도는 농업여건이 타 지방과 다른 만큼 전국 공통사업인 식량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 특별지시에 따라 1965년부터 감귤 식재붐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제주도는 감귤재배를 농어민소득증대사업으로 책정하여 장기저리자금으로 감귤과수원 조성자금을 지원하게 됨에 따라 1969년부터 획기적인 증식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우리 나라 과수 중 재배면적이 5천ha를 상회하는 5대 과수는 사과, 복숭아, 배, 포도, 감 등이었는데 감귤이 재배면적에 있어 사과 다음인 2위로 껑충 뛰었으며 1975년부터는 생산량에 있어서도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감귤재배 덕택에 1995년도 농가당 소득은 전국 9개 도 가운데 1위인 경기도보다 5만 5천원이 적은 2,721만 5천원으로 2위였고 농업소득만을 보면 전국 1위였다.



    즉, 이 제주도 경제의 밑바탕이 된 감귤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감귤나무를 들여오라고 명령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1978년에 드디어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조성이 되면서 관광객 100만 명이 돌파했다. 그리고 그 명맥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다. 그 덕인지 제주도에는 50~60대 이상의 장년층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엄청나다.



    9.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진 사회, 경제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

    - 이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고속도로 건설계획.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렸고, 근대화의 성공적 진전을 상징하는 사례로 비춰졌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박정희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비로소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 경제적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연장 대비 공사기간을 따져보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연장 20킬로미터였던 본-쾰른 간의 아우토반을 달리게 되었는데, 고속도로의 수송능력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였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외국에서 빌리고, 도로 건설 이후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라 고속도로 이용자에게 거두어들인 통행료로 빌린 돈을 갚기로 했다.



    박정희는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고 했고, 그의 경제 브레인이었던 오원철은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다. 구상부터 계획, 감독, 검사를 혼자서 해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창시자요 대부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역사상 박정희 고속도로로 남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공사는 단순한 건설 공사가 아닌, 군사 작전과 같이 군대식 총력 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사였다. 오원철은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평가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원래 1971년에 개통 예정이었으나, 무려 1년을 앞당겼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지만 1979년에는 1,636달러를 기록해 연평균 18퍼센트 증가했고, 수출은 연평균 38퍼센트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세웠다. 절대 빈곤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현명한 지도자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발전에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큰 역할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된 직후 월간 1968년 1월호가 각계 인사 100명에게 찬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68%가 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 찬성, 5%가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야당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도로 계획에 극심한 반대를 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렵고 차도 별로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니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2대 경제권의 중심인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경제발전의 첩경이 되도록 하기 위한 이유에서 건설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1967년 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방대한 구상을 끝내고 몇몇 구간의 노선까지 손수 결정해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속도로는 박정희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 우리나라 첫 고속도로인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70년 7월 7일에는 연장 428킬로미터, 4차선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3년에는 연장 251.8킬로미터, 2차선인 대전-순천 간 호남고속도로와 연장 176.5킬로미터, 2차선인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또한 1975년에는 연장 201킬로미터, 2차선인 수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수도권과 영동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후 철도 위주의 수송 구조가 도로로 바뀌었고,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었다. 공업 단지도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되었고, 산업 발전과 산업 생산성도 높아졌다. 고속도로 건설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헀다.



    10. 농촌의 진흥과 국민의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운 농촌혁명인 새마을운동 실시

    -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공업화를 통한 급속한 경제발전은 도시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농촌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농촌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22일 수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한 지방장관회의에서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하나의 농촌혁명과도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4일에 경남북 수해지구를 시찰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자발적인 자조정신과 협동심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통해 그는 농민들의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워 농촌을 개발해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안해낸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조성하였다. 이 결과는 2가지로 나타났는데, 한쪽은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제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냈다.



    반면, 다른 한쪽은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음에도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과를 지켜보고 박정희 정부는 성과가 있는 1만 6,600개 마을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공장,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 및 발전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과 우수한 새마을지도자 양성,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너지효과를 나타내면서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를 청산하면서 산업혁명과 농업혁명을 단시일에, 그리고 동시에 성공시켰다. 이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적 근대화운동으로 조직되어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은 30%에 불과해 나머지는 비좁고 꼬불꼬불한 고샅길에 가난이 엉켜 있는 형상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덕분에 이런 농촌의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농가소득 증가라는 눈부신 성과를 가져왔다. 1967년의 경우 농가소득이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하던 것이 70년에 평균 25만 6천원, 75년 87만 3천원, 78년 160만원으로 8년 사이 6배 이상 증가하며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이 새마을운동은 이후 세계 각지로 퍼져 세계 약 100여개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있고, 또 배우려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우리 한류의 첫 물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해외에서는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하고 있다.



    11.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효자산업으로 성장시킴

    - 1968년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준공된 이후 현재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의 단일공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1990년 6개의 차종에 56만대 생산능력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2010년 기준 13개 차종을 시간당 330대, 하루 6,600대를 생산한다. 연간 최대 150만대까지 가능하다. 설립 이후 2009년까지 차량 누계대수는 2,580만대에 이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출선적부두가 공장 내 위치해 수출기지로서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자동차 산업 역시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을 일으킨 직후 박정희 정권은 을 만들어 완성차 수입 금지, 국산화 정책, 수출 산업화 정책 등과 함께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1962년 세워진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부품을 수입해 '새나라자동차'를 조립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나라는 관세면제 등의 특혜를 받아 5.16 군사정권 초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물의를 일으켰고, 수요 감소로 설립 다음해인 63년 5월 생산이 중단된 뒤 65년 이어 신진자동차가 설립돼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했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코로나'를 선보였다. 60년대 말에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손잡고 '코티나'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70년대초에는 현대, 신진, 아시아, 기아산업 등이 4륜트럭 생산을 시작해 자동차 공업발전의 촉매역할을 했다. 이후 1975년 현대의 '포니'는 한국을 세계 15번째 자동차생산국가로 부상시켰으며, 1976년에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첫 수출했다.



    그리고 1986년 소형자동차 '포니엑셀'을 처음 미국에 수출했다. 현대차는 포니를 만들고 약 10년간 적자에 시달렸는데,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박정희 정권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에서 외국차를 못 팔게 하고 독점가격을 보장해주면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킨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세계 5위권에 진입할 정도로 급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웃나라 중국 대륙에 고속도로가 한뼘도 없을 때 산지가 7할인 이 작은 나라에 가당치도 않다는 고속도로를 닦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동차를 만들자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동차 생산계획 발표에 업계는 놀랐고, 교수와 지식층에선 후진국이 무슨 자동차냐고 반대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도 자가용을 마련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국내에서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효자산업으로 급성장을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이미 앞날을 내다보고 고속도로에 이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대표적인 산업으로 만든 것이다.



    12. 화교 억제정책을 통해 서민들의 골목상권을 지키고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성을 수호

    - 현재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교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에 속한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화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통화개혁이 그것이다. 화교들이 현금 소지를 선호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통화개혁을 통하여 화교들의 현금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화교의 생존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직접적으로 위협받았다. 또한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한 외국인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많은 화교들은 그 승인을 얻지 못했고, 그들의 토지를 시세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매도해야 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화교는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주택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되었다. 또한 취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이 사용 가능했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하였다. 한국 화교는 요식업에서도 여러 제한과 차별 대우를 겪어야 했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유독 차이나타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수가 부쩍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상업활동을 벌이기 위해 인천과 부산 등에 자연스럽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인 이주 100년의 역사가 지난 지금까지 차이나타운이 건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크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으로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갔다.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 대만 등지로 이주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2만 명 이상이 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지역에만 현재 8천여 명의 한국 화교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동산 취득제한, 거주자격 심사강화, 세무조사 등의 화교정책으로 한국의 화교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70~80년대에 화교들은 부동산 취득 등 부의 축적 수단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한국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13.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통한 '베트남 특수'를 누림

    -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특수는 한일국교정상화 청구비용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1960년대 경제개발 신화를 이끈 쌍두마차로 불리운다. 이 베트남 파병을 통한 베트남 특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신화를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와 경제 이익을 노리고 미국이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시행착오를 내부에서 논의하고 제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적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 기회에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베트남 파병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한 거의 모두가 달성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한국 국방부 공개 자료에 따르면 군사 원조 증가분이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 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 진흥지원이 총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 효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미국의 일반회계국이 1973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한국에 지불한 돈은 모두 10억 3000만 달러로 추정했다. 미국 국제개발처(AID)도 1966년부터 1972년 사이 한국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 소득을 총 9억 2500만 달러 정도로 추산했다.



    이러한 경제적 실리 이외에도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6.25전쟁에서 막대한 비용과 군사를 지원한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지원을 받은 한국 정부를 외교적 동반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이 없었기에 미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기를 국제사회는 꺼렸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미국에게 은혜를 갚았던 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국제사회의 시각이 인종전쟁, 즉 프랑스와 미국의 백인계와 베트남, 중국의 황인계의 인종전쟁이라는 불명예를 받았던 것인데, 이러한 인식을 깨기 위해서는 동양의 국가가 미국의 편에 서서 참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는 바로 우리나라가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전쟁물자 및 용역을 제공받았고, 또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차관 제공 등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그 결과 1968년 말 박정희 정부가 미국에 M-16 소총 10만 정 제공 및 공장 건설, 전폭기 17개 대대, 전략 공군 기지 건설 지원 등을 요청하여 요구 장비의 85% 수준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은 이와 같이 베트남 특수를 통한 한국 경제의 도약을 가져왔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과 미국의 안보 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뿐만이 아니라, 6.25전쟁 이후 군사훈련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만 학습하던 것을 베트남 전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쟁경험 기회를 전투병들이 체험하여 안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 식량자급으로 가난을 해결하고자 다수확품종인 통일벼를 재배하여 녹색혁명을 이뤄내

    -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기고 1960년대 중반 벼 신종품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에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다수확품종인 통일벼 재배가 시작되어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000만석을 돌파, 쌀 수입을 끝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이 달성되었다.



    또한 1976년에는 단군 이래의 최고 수확량을 기록했고, 드디어 쌀을 비축하기에 이르렀다. 즉,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민이 쌀밥을 먹는, 우리 역사의 기념비적인 해가 된 것이었다. 기아를 몰아내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정부와 농업공무원, 농민의 의지가 녹색혁명, 쌀 기적을 이뤄내고 보릿고개라는 비참한 시대에 살던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면 '녹색혁명'이라고 일컫는다. 이 녹색혁명의 성공은 박정희라는 국가지도자의 완고한 집념과 공직자, 그리고 농민의 삼위일체가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청와대에 농업 담당과 새마을 담당 특보, 그리고 농업 담당 비서까지 3명의 참모가 있었는데, 그 다음 정권부터는 농업 관계 참모가 단 한명도 없었다.



    한이 많은 보릿고개로부터 해방을 맞은 1976년의 쌀 생산량은 521만톤(3621만석), 10년 전인 1966년의 392만톤에 비하면 100만톤을 훨씬 뛰어넘는 수확이었다. 그런 뒤 1977년부터는 4천만석을 돌파해 세계 최고의 다수확국가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절미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2회 혼분식을 실시했고, 1972년 12월부터는 주5회 정도로 늘려 단속을 했다.



    식당에 수시로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뚜껑을 열어보고 절미운동 위반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검사했다. 이와 같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 결과 식량증산과 절미운동은 1976년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냈고, 그 결과 비로소 외국쌀의 수입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이다.



    1976년이라는 시기는 우리나라가 보릿고개라는 찢어지게 가난한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우리나라가 이제는 굶주림이 없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녹색혁명은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5. 훗날 2차례 남북정상회담의 기반을 닦은 남북적십자회담, 7.4남북공동성명 등의 대북정책
    -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 국방 이외에도 조국통일,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청사진을 구상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흔히 북한과의 평화적인 시기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를 꼽지만, 그 시기에 행해진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들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반을 닦아놓은 대북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도 남북한의 선의의 경쟁을 촉구한 1970년의 8.15평화통일구상선언, 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찾기 운동,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이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그리고 1973년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과 6.23선언, 1974년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뿐만이 아니라,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제의, 1977년 대북한식량원조 제의, 1978년 남북경제협력협의기구 설치 제의, 1979년 무조건적인 대화재개 제의 등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준비도 착실하게 추진하였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된 남북한간의 체제 경쟁을 승리로 이끌고, 또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통일에 대비한 착실한 준비가 오늘날 우리가 통일을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주목할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인데,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분단 27년만에 처음으로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이 성명에서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공식 천명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1991년에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에도, 그리고 90년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에도 적용되어 그 이후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큰 의의가 있겠다.



    1971년의 7.4남북공동성명은 무력통일에서 평화통일로 통일 방식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러니까 서로 끊임없이 다투던 그 시기에도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고자 노력했고, 또 이 노력의 성과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2000년 김대중 정권의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용으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관계 정립에 필수 요건임을 확신하고 밀어붙였는데, 일본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3년 말부터 야당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6월 3일에는 서울의 18개 대학생과 시민 등이 시위를 벌였다. 이는 6.3 사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한일회담 막후 주역으로 공화당 의장을 맡고 있던 김종필이 사표를 내고 외유를 떠날 정도로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에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타결되었다. 이로 인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 따라 무상 공여 3억 달러, 유상 재정 2억 달러를 각각 10년에 걸쳐 분할해서 제공받기로 했으며,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한일협정은 경제 회생을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6년간 '일제 식민통치의 한'까지 팔아먹은 전형적인 매국 외교라며 격렬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156권, 총 3만 5354쪽의 한일회담 전 과정이 담긴 외교 문서를 모두 공개했는데, 당시 민간위원으로 문서 공개에 참여해 샅샅이 문서를 살피고 정리한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2005년 8월 26일에 다음과 같이 문서공개관련 회견을 가졌다.



    "나도 한때는 한일협정이 굴욕 회담이라고 생각했는데, 3만 6000장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우리 정부가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비교적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굴욕적인 36년 식민 지배를 통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손해에 상당하는 보상은 부족하지만,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당초 8000만~1억 5000만 달러만 주려 했는데 우리 대표단이 최대한 액수를 끌어올렸다. 과거 청산이나 국익 유지와 옹호를 위해 당시 대표단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은 1951년 8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해 일본을 상대로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때, 일본의 이러한 행태들을 본다면 한일협정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간을 더 끌어 시일이 지난 뒤에 협정을 가졌다면 아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도 지적을 했듯이 말이다.



    분명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경이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끈 견인차였다. 당시 한국의 총 외환 보유고가 2억~3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 유입될 자본은 엄청난 금액이었고, 덕분에 수교 이듬해인 1966년에 무려 12.4%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제1차 5개년 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17. 경제적 자립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 기반을

    -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어 1973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 경제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근간을 이루며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로 발전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이전, 우리의 철강 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의 육성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고, KISA도 차관도입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철강업체를 만드는 데에 기반을 닦았다. 이 세계적인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에 불러 포항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박태준도 부담이 되서 여러 차례 거부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원래 KISA가 한국에 조강 능력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까지 완공하며 3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또한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금은 바로 한일협정 청구비용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포항제철 건설은 국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드디어 포항종합제철의 1기 용광로 공사가 완공되어 점화로에 불을 붙였다. 쇳물이 나오기까지 21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반도 포항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이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의 전적인 지원과 격려, 그리고 박태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포항제철은 선진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준공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후 포항제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는 국가의 중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조강 생산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등 국가 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이라는 포항제철을 건설한 CEO의 위대한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결단력과 포항제철 창업단의 불도저와 같은 리더십, 포항제철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 이제는 세계 굴지의 제철공장이 되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단순하게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항제철은 국내의 철강산업을 선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선두에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18. 2001년~2012년까지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대표적인 조선산업의 기반을 다짐

    -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 조선소 건설이었다. 조선소 건설은 돈도 기술도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외국에 나가 손을 벌리니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없었고, 정주영을 박정희가 거의 강제적으로 해외로 보냈다. 그 이후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과 의논을 한 뒤 조선사업은 시작되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군사강국인데다가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해양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울산 단지가 들어서고 일자리와 국민 총소득은 조금씩 늘어났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거지는 넘쳐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조선산업을 결심했다. 그는 이 산업만 성공한다면 자주국방도, 일자리 창출도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조선산업을 통해 자연히 기계와 자연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대규모 산업은 정부 관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경제기획원 장관인 김학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주영을 추천했다.



    정주영은 조선산업을 위해 해외로 나가 기술 제휴와 차관 도입에 나섰으나 미국, 일본, 캐나다 등의 회사는 냉담하게 그를 돌려보냈고, 이에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한다면 국가사업에 있어 현대건설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치게 하여 정주영은 계속 시도하였고, 드디어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왔다.



    4,30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 한국으로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조선산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조선소를 완공했고 리바노스가 발주한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했다. 한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대형 유조선을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1위 조선국이 된 것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정주영의 추진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즉,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1년을 대한민국이 조선산업에서 세계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 '공업입국' 신호탄인 공업단지를 조성, 경공업·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 1962년 2월 3일, 울산에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이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울산공업단지를 혁명공약(경제개발)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이 울산공업단지의 조성은 박정희에게는 경제개발의 거의 최초의 시도이자 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을 가지기 이전에 이미 1962년 1월 27일에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하여 공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울산에는 여러 화학, 석유와 관련된 중화학공업이 실제로 시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고작 생사 270만 달러를 수출했던 데 비해, 1970년에는 섬유류 수출이 3억 4,110만 달러나 되었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수출이 섬유류, 합판, 가발 등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었다. 그 이후 1965년 3월 12일에는 구로공업단지의 기공식이 있었다. 또한 1967년 4월 20일에는 요소비료를 연간 33만 톤 규모로 생산하는 한국비료가 준공되었고, 1964년 5월 7일에는 울산정유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울산공업단지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산업화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이 울산공업단지에는 중화학공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1968년부터 가동에 들어갔고, 1972년에는 현대미포조선소가 준공됐다. 울산이 공업단지로 선정되면서 변변한 항만시설도 없는 곳에 기계와 시설자재를 실은 대형선박들의 왕래가 부쩍 잦아졌다.



    당시 울산은 인구 8만 5000명 정도의 전형적인 농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2년 1월 15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울산이라는 농어촌을 대한민국 최초의 공업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 석유화학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카바이드법에 의하여 폴리염화비닐(PVC)을 생산해 낸 것을 그 효시로 한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석유화학공업이 시작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1964년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 가동으로 원료인 나프타의 국내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중 섬유·플라스틱·타이어·세제 등 석유화학산업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는 산업들이 개발됨에 따라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업스트림 부문은 대한석유공사를, 다운스트림 부문은 충주비료를 주축으로 하여 1968년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1970년에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 내에 석유화학의 방향족계 원료인 BTX(벤젠·톨루엔·크실렌)공장을 건설·가동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 10월에는 에틸렌 기준 연간 10만 톤 생산규모의 나프타 분해공장 및 9개 계열공장이 완전 가동되었다.



    이로써 국내 석유화학공업은 대량생산으로 본격적인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기초 유분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공업단지의 신호탄으로 경공업을 하던 공업단지에서 이제는 더 나아가 중화학공업이라는 한층 성장된 공업단지가 되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20. 서민들의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 1968년에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전차가 폐지되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온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대량 수송이 가능한 대중교통이 하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결국 대한민국 철도청이 지하철에 대해 연구하였으나 다른 과제로 인해 묻혀버렸고, 당시 서울특별시장 윤치영과 김현옥에 의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철도청장을 지냈었던 양택식이 김현옥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재임중에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으나 김학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양택식의 편을 들어주었고,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지하철은 1호선이 1971년 4월 12일 착공해 3년 4개월 만인 1974년 광복절에 개통했다. 거리는 서울역~청량리로 7.8km 길이였다. 당시에는 서울역이 서울역앞역으로, 시청역은 시청앞역으로 불렸으며, 동묘앞역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1971년에 일본에서 들여온 외자 94억원과 국내자금 240억원을 투입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지만 일본의 기술협력과 엔 차관이 결합하여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지하철 개통은 새로운 주거지역이 개발되고, 또 대단위 주택단지가 건설되고, 또 도시기능이 분산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21. 세계에서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효자산업인 반도체 전자공업의 기반을 다짐

    - 역사적으로 농경시대에는 농사를 짓는 기술이, 산업사회에서는 기계기술과 전자기술이 생존 수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바로 우리나라가 최초로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의 기간산업을 정부 주도형으로 기획하고 육성하였다.



    중화학공업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육성되던 시기인 1974년 1월에 한국반도체는 설립되었다. 국내 유수의 오퍼상인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 생산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회사가 바로 이건희 눈에 띄었다. 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닥쳐 큰 폭풍에 휩싸였는데, 이건희는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에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30대 초반이었던 이건희는 아버지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건의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희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병철도 반도체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77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는데, 언젠가는 반도체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전자산업이 앞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니 국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전자산업의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 2. ㅁㅁ
    '21.10.27 3:48 AM (59.7.xxx.16) - 삭제된댓글

    박정희는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을 먹여살린 대통령
    문재인은 집값 올려 국민 뜯어먹는 대통령.

  • 3. 원래
    '21.10.27 4:01 AM (81.151.xxx.130) - 삭제된댓글

    독재자들이 본인들이 저지른 쿠데타의 정당성 혹은 당위성을 위해 치적사업이란 걸 많이 하지요. 그 18년의 독재기간이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괴론이 아직도 이렇게 횡행하다니 참 놀랍네요. 수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암살당했고, 죄 없는 시민과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이 공작정치에 의해서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건들이 수 없이 많은데 말이죠. 지금의 미얀마 상황과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의
    미얀마 사람들이 미얀마쿠데타세력이 공장 짓고, 도로 건설하고 경제 성장시킨다고 환호하고 쿠데타 옹호하던가요?

  • 4. ...
    '21.10.27 9:09 AM (223.39.xxx.114) - 삭제된댓글

    ㄴ노땅들 뇌피셜 알고 싶지도 않고 박정희만 아니였어도 얼마나 강대국이 되어 모두가 아무도 피흘리지 않고 행복하게 잘살았을지 생각하면 가슴속 분노가 일어난다~

  • 5. 가을소리
    '21.10.27 2:41 PM (183.106.xxx.140)

    북한 공작원 냄새나네 ㅋㅋ

  • 6. 절규
    '21.10.28 3:41 AM (59.7.xxx.16) - 삭제된댓글

    박정희의 다른 치적은 몰라도 사유지의 그린벨트 지정만큼은
    그의 무덤에 가서 침을 뱉고 싶다.
    1971년 당시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도 많고
    주변이 다 농지였으니 재산상 별 손해가 없었으나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정책이 성공해서
    1980년대에 성공의 열매를 부동산 오른것으로 온국민이 다 나눠먹을 때
    철저하게 소외된 그린벨트 원주민들은
    손가락 빨며
    이제나저제나 그린벨트가 풀려
    우리도 소득향상의 기회가 오겠지 기다린 지 어언 50년이 지났다.
    우리 아버지도 그린벨트 풀릴날만 기다리다 그날을 못보고 돌아가셨는데
    그린벨트 원주민들은 박정희의 덕을 본것이 없다.

    그린벨트 지정한 목적은 진즉에 달성했는데도 풀지않는 것은
    싼 땅 만들어 뺏어 아파트 지어 팔아서 정치자금으로 쓰려는 도둑놈들 때문이라.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만든 원흉
    그린벨트 무법으로 지정한 박정희를 저주하고
    그린벨트를 풀지않은 박그네를 저주한다.

    웃기는 것은
    남의 권리 제한해서 편익을 누리면서도 박정희나 칭송할줄 알지
    그린벨트 원주민들이 50년 동안 갖가지 악랄한 규제속에서 1970년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알려고도 않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그린벨트는 박정희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떠드는 자 들이다.
    남의 희생에 50년 무임승차 했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그 입 다물라.
    하다못해 자동차라도 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 할것이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588624 머리카락이 갑자기 가늘어졌어요 ㅜ 71년 14:48:33 75
1588623 옷차림 1 000 14:47:45 105
1588622 영어고수님들 있으면 도와주세요 영어 14:45:29 80
1588621 의료개혁은 앞으로 ㅇㄷ 14:44:36 86
1588620 옷을 사고 싶은데....도와주세요 7 옷못입는여자.. 14:43:41 263
1588619 베이킹 손반죽 힘든가요? 1 .. 14:43:27 61
1588618 이번 감기 오래가요? 3 .... 14:40:54 90
1588617 고 2 3월 모의고사까지 의미없나요? 6 14:39:46 158
1588616 땅콩버터 안 좋은 음식 아닌가요? 7 글쎄 14:38:51 441
1588615 훈제목살. 냉동 몇달째.먹어도 될까요? 아자123 14:36:44 24
1588614 웨지우드 와일드 스트로베리 8 ... 14:34:59 248
1588613 어문계열 진학 과탐이 필요한가요? 3 문과 14:31:51 103
1588612 딸기쥬스 드세요 3 14:30:07 606
1588611 저같은성격 없을거예요ㅜㅜ 6 ㅜㅜ 14:29:27 575
1588610 컬리에서 비비고 왕교자 46%세일 하는데 사실 분 1 공구 14:20:04 461
1588609 다초점렌즈 적응하면 진짜 괜찮나요? 4 노화노안 14:05:36 493
1588608 의대 증원 문제... 결정 시한이 언제까지인가요? 15 의대 14:03:15 617
1588607 네이버 줍줍 이요~~ 11 네이버 14:00:29 799
1588606 우리 인간적으로 남편자랑 솔직히 해봅시다 11 ㅋㅋ 13:58:52 1,007
1588605 문프 때 환율 1200원, 요소수로 나라 망해간다던 조선/ 펌 13 뭐하냐 13:58:32 814
1588604 네이버 줍줍 3 ewr 13:58:14 428
1588603 1일 1사과 먹다 비싸서 1당근 먹는데 20 .. 13:57:34 1,746
1588602 드럼세탁기 건조코스에 청바지 돌리면? 4 .. 13:55:27 299
1588601 유튜브)영어 안 섞어 쓰면 죽는 사람들 7 웃김 13:49:16 565
1588600 남은 인생 짜릿하게 즐기고싶어요 20 .. 13:49:03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