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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어린시절 기억이

ㅇㅇ 조회수 : 915
작성일 : 2021-09-20 18:25:03

저는 어릴 때 할아버지 하면 호랑이가 떠올랐어요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잘해주신다고 하는 게 어떤 건지
상상도 안 되고 할아버지는 그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

다섯 살 때 추석에 선산에서 차례를 지내는데
고조부묘 고조모묘 증조부묘 증조모묘 이렇게 계속 돌아가며
차리고 절을 하고 하니 너무 힘들어서
북어포에 손을 대며
이건 언제 먹어요? 했을 때
우리 할아버지의 찌릿 하는 눈빛
차례가 끝나자마자 저를 번쩍 안더니
어디 산 구석탱이에서 나무를 손으로 휘어잡아 꺾어
버릇 없이 차례상에 손을 올린다고
에미 애비가 버릇도 없게 키운다고
회초리를 만들어 나를 때리려는 찰나
큰아버지가 오셔서 어린애가 뭘 알겠냐고
할아버지를 말리고
저는 정신이 몽롱하게 엉엉 울었었어요.
그 후로 추석만 떠올리면 맞을뻔한 기억땜에
제사음식에 손 대면 이건 뭐 죽는구나 싶은 마음으로
자랐지요.

우리는 할아버지랑 한상에서 밥을 먹으면
절대 갈비나 불고기 이런 건 먹으면 엄청 찌릿하는
눈총을 받았었고요.

아주 괴팍한걸로는 어디가서 2등은 안 하실 것 같은 할아버지지만
할머니에게만은 정말 다정하셨어요. 늘 꿀이 떨어졌죠.
할머니가 일찍 치매로 힘들어하셨는데
할아버지는 지극정성이었어요.
매끼 사과 반쪽을 숟가락으로 긁어 할머니 입에 떠 넣어 주시던 꿀 떨어지던 모습이 선 하네요.
그래도 어린 손주들한테는 다정한 말 한마디 없었죠.

할머니만 서울에 우리집에 계시고
할아버지는 시골과 우리집을 오가시던 어느날
할아버지가 아침에 서울 올라간다는 연락을 하셔서
엄마는 장에 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엄마보다 5분이나 먼저 도착했나봐요.
성격급한 할아버지가
우리 국민학교로 찾아왔더라고요.


기세 좋게 교무실 문을 열고 6학년에 아무개를 찾는다고
내 손녀딸인데 걔 엄마가 장에가 쇠때(열쇠)가 없어 문을 못여니 내 손녀딸도 쇠때가 있을 거라고.
6학년에 아무개가 몇반인지 아시냐 하니 할아버지는 알 길이 없고
결국 15반까지 있던 6학년 생활기록부를 한꾸러미 내어 받으시고
할아버지 여기서 아무개 찾아보세요 하니

우리 할아버지 성격급해서 학교 왔는데
이걸 보고 손녀딸 찾으라니 너무 화가나서 폭발직전에

교감선생님이 저 할아버지는 누구시냐 해서
어떤 선생님이 6학년에 아무개를 찾는다시네요 했더니
교감선생님 90도로 인사하시며
아무개 할아버지시냐고 아무개는 내가 우리학교에서 가장
사랑하는 학생이라고 (자랑하려고 쓴 글은 아닌뎅)

교감선생님의 에스코트를 받고 우리 할아버지는 우리 교실로 와서
담임선생님의 인사를 받고
제가 나가 열쇠를 드렸지요. 할아버지를 학교에서 만나는 일은 진짜 엄청 놀랄 일인데 우리 할아버지 입이 귀에 걸려서.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어떻게 교감이 알어 어떻게 교감이 알어 하시며
저는 특별대우 받았습니다.


교감샘은 어쩌다 4학년때 심부름을 하게 된 인연으로 저를 잘 챙겨주셔서 학교에서는 제가 교감샘 손녀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뎅.
어른이 돼서 찾아뵈려니 어렵더라고요.

호랑이 같지만 좀 웃긴 할아버지와
따뜻한 교감샘이 생각나서 써봤어요.
IP : 109.38.xxx.244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dd
    '21.9.20 6:52 PM (221.155.xxx.192)

    재밌게 잘 읽었어요.
    근데 호랑이 할아버지는 어쩜 할머님께 그리 다정하신거죠?
    시대 생각하니 특별한 모습같아요.^^

  • 2. ㅎㅎㅎ
    '21.9.20 7:03 PM (121.133.xxx.137)

    글 재밌게 잘 읽었어요
    제 시할아버님도 생각났구요
    남편이 어릴때 아버지가 공립학교 교사였던
    관계로, 이사를 많이 다니니
    장남이던 남편을 조부모님께 맡겼었대요
    그 할아버지가 그리도 엄해서
    인사만하지 곁에 앉아 밥 먹거나 대화도
    못하고 지냈다는데
    할머니에게 그리도 잘하셨대요
    말은 퉁명스레 하면서도
    감기라도 걸리면 그리 안절부절함서
    죽 끓여 먹이고 한약 사다 달여 먹이고...
    6.25때 그 귀한 틀니를 해드렸다니
    말 다했죠
    근데 시엄니한테 들은 바로는
    시할머니가 엄청 몸을 아끼고 일을 안하는
    스타일이셨는데
    평생을 외모를 그리 꾸미시고
    애교가 장난이 아니었다네요 ㅎㅎㅎ
    무뚝뚝한 울 셤니 표현으로는
    전직이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고 ㅋㅋ
    흥도 그리 많으셨다더라구요 푸훗

  • 3. ㄱㄴㄷㄹ
    '21.9.20 8:28 PM (122.36.xxx.160)

    잘 읽었어요^^
    한편의 동화 같은 장면들이 재밌네요ᆢㅎㅎ

  • 4. 글이
    '21.9.20 9:27 PM (221.143.xxx.37)

    너무 재미있어요. 니미 할아버지의 자랑이셨겠네요.
    그게 바로 효도죠. 무뚝뚝하고 엄한 할아버지가
    부부간의 정은 유별나게 좋으셨다니 부럽네요.

  • 5. 한 편의 수필
    '21.9.20 10:12 PM (49.163.xxx.163)

    너무 잘 읽었습니다^^
    그시절이 잘 그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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