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스로도 바보같았던 기억.. 돌아보면 많죠,
그중에도 생각나는 기억은.
실업계고에 입학한 첫날, 체육이 들어있었어요.
눈빛이 형형한 흰머리백발선생님이
칠판에 먼저 한자로 자신의 성함 세자를 휘갈겨 쓰셨어요.
난초풀잎을 닮은듯한 한자들이 초록색 칠판에 삐이익~
분필이 미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혹은 분필이 중간에 부러지기도 하면서
장황하게 마침표까지 끝내더니.
"자아!!내 이름은 ***이다, 이순신장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이기도 하다.이걸 모두 백번을
써와서 내일 수업시간에 모두 제출하기바란다."
그날 100번을 써서 제출하려고 보니,
저만빼고 다 안써왔더라구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건 농담인데 진짜 믿었느냐고 주변 급우들이 웃었어요.
그덕분에 지금까지도 그 선생님 성함은 안잊었지만,
저스스로도, 너무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던 성격이어서
친구도 그런 친구들만 있었고, 어느정도의 정해진 선을 절대 스스로 나가지 않았었어요.
겁도 참 많았고요.
그런 제가 어느덧 중년이 되다보니, 많이 달라졌어요.
아이들도 둘이나 키운 엄마도 되고,
한번은, 직장동료였던 분이,(그분도 저와 비슷한 성향)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는데
a라는 친구가 부럽대요.
그이유는 a는 커다란 요양원에서 간호관리과장으로 있으면서 높은 월급을 받고지내고
외아들은 다 커서 울산대기업에 들어가 한달에 한번씩 오고
남편은 15년전부터 대기업의 임원으로 주말에 한번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생활을 하니
밥도 안하고, 저녁에 동네산책하고, 아파트는 세채를 마련해두었고 현금도 꽤 있는
상황이 부럽다는거에요.
그런 상황들은 이미 한선생님도 겪어봤던 상황이시지않느냐.
직장생활도 병원에서 30년을 수간호사로 근무했었고.
형부와는 함께 매장을 운영하면서 그모든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밥도 같이 먹는게
더 즐거운거다, 남편인줄 알았더니 남편이 아니더라라는 말까지 있는 이유는
15년을 주말부부로 지내온건 이미 잠정적인 합의사항이지않느냐.
그리고 그분의 아들은 자신의 스펙에 맞춘 시간표대로 들어간 회사인데,
그게 그리 부러울 상황은 아닌거다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정말 그런걸까??
자신은 아이가 하나도 없어서 이런 모든것이 부러웠다는데
이미 품을 떠난 자식은 이미 자식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잖아요.
라고 했더니,사람들이 왜 아이가 없냐는 말에 많이 시달려왔는데
그런 질문을 한번도 안하고 늘 착했던 사람이라 고맙대요..
그말에 잠시 양심이 찔린것 같았어요.
분명 20년도 더 넘었던 그 시절에 미혼의 저와 이런저런 세월을 넘어온
중년아줌마의 저는 분명 달라졌을테니까요..
그 덤으로 솔직하게 참새처럼 떠들때보다 더 가슴속에 묻어두고 무거워진 가슴속의 무게를 재보는 일 은 제 몫인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