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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전 소소한 집정리할때

노란어깨 조회수 : 7,176
작성일 : 2020-05-25 22:40:47

44세만 되어도 등뒤에 귀신이 와있는걸 안다고 서정주시인이 말한 나이.

이 세상의 그 어떤것도 거칠것이 없다고 말한 나이, 불혹.

이 나이쯤 와보니, 팔 걷어부치고 문밖으로 성큼성큼 나설 일도 있었던게 생각나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심약한 큰애가 늘 아이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오면 일부러 엄마의 힘을 보여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하면서 다음날 학교를 찾아간일이 수두룩했었음.)

그러기전의 저는 태어난지 한달도 안된 아기가 밤에 잠을 안자고 울면 달래다가 같이 울고,

현관문에 달린 렌즈구멍이 시뻘건 색깔로 물든것을 무서워하면서 못열다가 정신차려 열어보니

붉은 글씨로 크게 쓴 피자집 신장개업광고지였던것에 아연실색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제가 불혹을 넘기고 등뒤에 귀신이 온것도 알아차리는 나이보다 조금 더 먹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약하고 여전히 가시돋친 소리는 못하는건 똑같아요.

그런 제가 집안일들을 하면서 은근히 좋아하는 게 몇개 정도 되요.

깨끗하게 정리가 다 되고, 마무리가 다 되어갈 무렵에, 베란다에서 바삭바삭하게 마른

식구들의 빨래를 거둬들일때 풍기는 그 햇볕과 바람냄새가 좋아요.

그렇게 거둬들인 빨래들을 개킬때 청결해진 소맷부리나 무늬를 보면서 그 옷의 주인인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는동안, 마음이 누그러지고 온화해지는게 좋아요.

그다음은, 그릇이 아닌, 컵을 닦을때 기분이 좋아져요.

이상하게 싱크대에서 컵을 닦는 일쯤은 오히려, 누군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웠던 

 고양이같은 시간을 떠올리게 해요.

그리고, 말끔하게 닦여진 식기들이 티끌도 없이 가지런히 놓여져 부엌한켠에 정돈되어있을때.

방금 막치운 식탁이 반들반들 빛날때.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다가, 칫솔걸이에 나란히 걸린 식구들의 칫솔을 볼때면

또 맘속에 비가오기전의 물묻은 바람냄새처럼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좋아요.

그렇게 가족들이 각자의 취향대로,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좋아하는 색깔의 칫솔로 이빨을 닦고,

간혹 칫솔모가 너무 벌어지면 새것으로 교체해놓는 그 소소한 일에도

또 그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애정이 맘속에서 피어나요.

욕실의 수건이 젖으면 늘 새수건으로 걸어놓고, 양말을 늘 빨아 걸어놓고,

지저분해진 운동화는 빨아 햇볕아래 널어놓으면서

그렇게 저는 매순간, 집안일에 손을 대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요.

그냥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들, 돌아보면 그 얼마나 많은 추억을 실고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걸까요.

냄새나는 양말과, 젖은 수건을 늘 습관처럼 세탁하고 거둬들이며

살면서 엄마인 저는 그렇게 우리 가족들의 얼굴을 하루에도 몇번을

되새김질하고 사는거였군요.

우리아이들아, 그러고보니, 너희가 엄마가 있어서 좋을때가

늘 새수건으로 얼굴닦을때가 좋았다고 할때가 이제 생각난다~

엄만, 너희들이 하기싫어하는 그 집안일들이 어쩌면 보고싶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이 자동 소환되어서 즐거웠나보다.

그리고, 이런 집안일을 하면서 조금은, 매섭고 정없기만 했던 우리 엄마가

조금씩 이해되더라구요.

그 화마와 같던 무서운 세월을 지나왔던 엄마도, 매일 먹는것만 안다고 어릴때는

그토록 미워하던 이 늙은 둘째의 등짝 어루만져주는데도, 그마저도 흠칫

기분나빠하던 모습에서 늙은 엄마,행여나 마음 다치지 않았나 걱정은 되면서도,

왜 또 슬쩍 눈치를 보는 나, 드디어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곳으로

떠나버릴때,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떠난사람

그 빈자리가 차가움을 얼마나 마음아파할지.

미리 예감하게 하는 엄마가

이렇게 손에 익은 집안일을 할때면 홀연히 생각나요,

IP : 121.184.xxx.131
2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아름다운 작품
    '20.5.25 10:41 PM (115.143.xxx.140)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 ㅁㅇ
    '20.5.25 10:48 PM (116.123.xxx.25) - 삭제된댓글

    잘 읽었습시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 3.
    '20.5.25 10:53 PM (223.38.xxx.230)

    서정주 친일이라며 저쥬하는 댓글이 올라올 겁니다.
    놀라지마세여.

  • 4. 원글
    '20.5.25 11:02 PM (121.184.xxx.131)

    아,맞다 .서정주 친일이었죠.^^

  • 5.
    '20.5.25 11:03 PM (118.222.xxx.21)

    좋은글 감사합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 6. ....
    '20.5.25 11:04 PM (1.246.xxx.46) - 삭제된댓글

    집에서 살림하고 싶게하는 글이네요
    현실은 퇴근후 피곤해서 집안곳곳이 아수라장이네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일 출근하려니 ㅠㅜ
    애들 어릴때 학교보내고 오전에 집안정리하고
    커피한잔 하던때가 그리워요

  • 7. ...
    '20.5.25 11:09 PM (223.62.xxx.128)

    글을 잘 쓴다, 라...

    저는 그 분 생각나요.
    빌라 지하에 살던 때 얘길 주기적으로 올리시는 분.
    글에 수식이 덜해지면 훨씬 나아질 텐데.

  • 8. ㅡㅡㅡㅡ
    '20.5.25 11:09 PM (220.95.xxx.85)

    전에도 글 쓰셨었죠 ? 그때도 님의 집 구경을 가고싶다 여겼는데 넘 좋아요. 혹시 블로그나 인스타 하시나요 ? 님이 궁금해지게 하는 글의 마력이 있어요. 표절로 시끄러웠지만 신경숙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 그런 게 있네요

  • 9. ..
    '20.5.25 11:14 PM (180.230.xxx.161)

    글 잘 읽었어요^^

  • 10. 루시아
    '20.5.25 11:14 PM (121.125.xxx.3)

    우와 글 참 잘 쓰시네요~~
    제가 마치 집안일을 하는듯~~~
    글이 참 이쁘네요~

  • 11. 원글
    '20.5.25 11:15 PM (121.184.xxx.131)

    신경숙소설가는 참 안타까운 분이죠,
    아무나 못 가지는 그 재능과 섬세한 결을 가진 문체의 힘만으로 한국문학의 거장이었잖아요.
    안그랬으면 벌써 많은 작품들이 나왔을텐데, 현재 그 스토리들은 신경숙소설가의 서랍속에만 있는걸거에요.

  • 12. ㅡㅡㅡ
    '20.5.25 11:55 PM (220.95.xxx.85)

    그렇죠. 신경숙 안타깝죠. 너무 좋아했기에 더 그렇네요. 아무튼 저도 가지런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님 글의 느낌이 너무 좋네요. 님의 얼굴도 그릇마냥 반질반질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13. 에스텔82
    '20.5.25 11:58 PM (112.147.xxx.134)

    오늘 저녁에 설거지하면서 '이제 설거지도 안하네' 생각하며 나 말곤 할 사람이 없군... 어차피 내일 또 내가 하게 될텐데 미리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마지못해 했는데요. 님 글을 보면서 반성하게 되네요. 빨래 널고 걷으면서 왜 이리 먼지가 많이 날리나 싶고, 이제 빨래 너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구나 싶던데... 아들 조차도 세탁 끝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세탁기가 엄마 부른다고 ㅠㅠ
    집안일 하면서 가족들 모습을 한번 떠올리게 만드는 글이네요.
    따뜻한 글 감사해요.

  • 14. 원글
    '20.5.26 12:09 AM (121.184.xxx.131)

    사실 신경숙은 이미 한번 썼던 에피소드를 다른 책에도 덧붙이는 경우를 다른 소설가에 비해서 많이 본것 같긴해요, 그때면 이런 상황을 공모전에 출품해야하는데 일반인이 이런식으로 한번 더 썼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할만큼 좀 아리송한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소설가들도 좀더 달리 생각을 해본다면,
    다른 소설가들도 몇번씩 비슷한 문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슷한 에피소드들 몇번씩 쓰는 사람들 있긴 하던데....

  • 15. 와우
    '20.5.26 12:21 AM (125.184.xxx.10)

    예전 샘터에서 보던 손바닥글들 수필
    생각나네요
    어쩜 살림도 반짝반짝
    글도 반짝반짝 ~~

  • 16.
    '20.5.26 1:12 AM (61.74.xxx.64)

    소소한 집안 일을 하며 떠올리는 가족 얼굴들.. 아름답고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보송보송한 행복과 향기가 느껴지네요. 두고 읽어볼 수 있게 지우지 말아주시고 또 예쁜 글 기다릴게요

  • 17. 저번에
    '20.5.26 2:01 AM (211.112.xxx.251)

    지하방 노란전등 누구나 오고싶어하는 집 이야기 쓰신분 맞죠?

  • 18. 따뜻
    '20.5.26 6:44 AM (183.106.xxx.99)

    전 소소한 집정리할때 글이 참 따뜻해요

  • 19. ....
    '20.5.26 7:40 AM (223.62.xxx.46)

    집안일 정말 싫어해서 도우미에게 맡기는데
    이글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집안일에 정을 붙였을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기본 정리할 때 마음가짐을 달리해보겠습니다.^^

  • 20. 진짜
    '20.5.26 8:46 AM (114.206.xxx.143)

    글에도 지문이 있나봐요
    빌라 지하 이야기, 광목커튼 쓰신분 맞는듯요
    저 윗님 말씀처럼 수식이 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21. 글에도
    '20.5.26 9:50 AM (59.30.xxx.86)

    지문이 있다는 댓글 무척 신선하네요.

  • 22. .ㅡ.
    '20.5.26 9:57 AM (211.215.xxx.107)

    글을 쓰실 때 긴 문장을 조금 잘라서 써 보시고
    수식어를 붙일 때, 조금 절제해서 간명하게 써 보세요.
    그리고 어떤 비유를 하실 때
    예를 들어
    고양이 같은 시간은, 뭘 나타내고자 하는 비유인지 암시를 주시면 이해하기 좋을 것 같아요.
    독자로서 드리는 말씀인데
    주제넘은 소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 23. ***
    '20.5.26 10:27 AM (112.187.xxx.131)

    글 잘 읽었습니다.
    참 따뜻한 글이네요. 가슴이 따뜻해 옵니다.

  • 24. ㅡㅡ
    '20.5.26 10:27 AM (121.143.xxx.215)

    좋은 글이긴 한데..
    저도 이런 글은 사선으로 쭉 넘겨 읽게 되긴 해요.
    저도 수식이 적은
    간결한 글을 좋아해서요.

  • 25. 원글
    '20.5.26 12:37 PM (121.184.xxx.131)

    일부러 수식을 넣는게 아니니 그만 혼내주세요^^
    그렇다고 작정하고 수식을 넣은 화려한 글로 꾸민것도 아니고요,
    제 마음이 가는대로 활자들이 모여 텍스트화 된거니까 넓은 아량으로 봐주세요,
    멋지게 쓸려고 마음먹은 글이 아니라는것 분명 어떤 분들은 아실겁니다.
    간혹 제 글보다 더 현명한 답이 달릴때가 있어요.

  • 26. 괴롭다...
    '20.5.26 6:51 PM (223.62.xxx.96)

    악플로 오해 받거나 상처 주기 싫어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수식 관련해 얘기를 하는 건,
    보기가 너무 괴롭기 때문이에요.
    (안 보면 된다고 할지 몰라도
    제목만 보고 누가 썼는지 알 수는 없으니까요ㅠㅠ)

    음치가 자꾸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발표하고
    노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와~ 박수를 치며 노래 잘 한다고 칭찬하는 걸 보는 느낌?
    그러니 이 사람은 자꾸 노래를 더 하고 ㅜ 그걸 들어야 하는 괴로움. 하아...

    수식을 배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맞춤법도 손봐야 하고
    (사소하다 하신다면 오산.
    글에서 문법은 기본입니다.
    글솜씨는 기본이 갖추어진 다음의 얘기.)
    비문도 고쳐야 하고 중언부언 하는 반복은 잘라내는 게 마땅하고
    우리말에 없는 지나친 피동은, 글쓴이가 초등학생이라도 그렇게 쓰면 교정받아야 하는 겁니다...ㅠ

  • 27. 와우
    '20.5.26 7:19 PM (115.136.xxx.119)

    원글님 마음이 따뜻하고 소녀같으신분일거예요~ 저는 글을 잘쓰지는 못해서 이렇게 따뜻하게 글을 올리신분들 보면 너무 부럽고 감탄해요
    그래도 책은 많이 읽는 편이고 독서모임도 오래해서 많은분들이 수식이 많다 읽기 오글거린다 하는부분이 무언지 객관적으로 보이기는 하네요
    위에서 부터는 너무 잘 읽다가 친정엄마 떠올리는 부분은 잉? 뭐라는거지? 다시 읽었어요 수식이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해서요 ㅠ 그래도 공감되고 미소짓게 되는 기분좋은 글솜씨세요 감사해요~오늘 아들입대시키고 심란한맘이었는데 저의 지난날도 돌아보았넹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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