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헬세권 사는 이야기 2

... 조회수 : 1,863
작성일 : 2019-10-16 00:16:46
저는 헬세권에 삽니다.

광화문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늘 시위를 접하곤 해요.
우리나라 심장부이기도 하고
시위와 행사가 겹겹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제가 광화문을 광장으로 처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였습니다.
그전에는 제야의 종소리,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때 정도가
가장 큰 거리 축제였던 것 같아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월드컵 당시 남편 사무실이 교보 옆 건물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이가 어렸고
거리로 나가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붉은악마 셔츠를 입고
남편 사무실에 가서 창문을 열어놓고
텔레비전을 틀고 
바깥에 앉은 수많은 붉은 악마들과 방향을 맞춰 앉아
같이 구호를 외치며 응원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현장감 넘치는 순간이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창밖에는 붉은악마 응원단이 커다란 전광판 앞에 앉아
쩌렁쩌렁 한 목소리로 응원을 하였고
우리는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오디오로 실시간 함성을 들으며 그들과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그 기억은 독특하고 굉장한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후로는 말하고 싶지도 않은 졸렬한 명박산성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시간을 건너 뛰어 2016년 박근혜 탄핵집회
그 추운 겨울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을 가득 메웠을 때
저는 이제는 많이 자란 아이와 함께 세종회관 앞에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 어느 분께서
박근혜 탄핵 광화문 집회시 가까워 집에 가기가 편했을 거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맞습니다.
엎어지면 코닿을 데 살고 있으니
집에 가는 것은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였죠.
그런데
거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습니다.
홍길동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저 역시 제 집을 제 집이라고 찾아갈 수 없었으니까요.

경찰버스가 겹겹이 동네길까지 막아선 상황이었고
당시 청와대 쪽으로는 
개미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경찰이 
완벽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곳이
국립민속박물관 앞이었고
거기까진 시위를 하면서 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집에 가려면 그 위쪽으로 더 가야만 했기에
경찰버스에 막혀 더 이상 집쪽을 향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촘촘히 막아놨는지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가 없었고
겹겹이 경찰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집에를 못 가게 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그쪽이 집이라는 말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무도 못 간다고 하더군요.
말을 해도해도 안 되더니
책임자인듯한 사람이
저한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싫다고 했습니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저는 불심검문도 무척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찰이라고 해도 내가 내 집에 가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무슨 이유로 나를 못 가게 하느냐
신분증 요구에도 응할 수 없다.
나는 그냥 집에 가려는 것 뿐이다 버텼습니다.
남편은 까짓거 보여주고 가자고 했지만
마구 구박하며 안 된다고 했어요.

그들이 뭐라 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저는 계속 집에 가겠다고 했고
결국 신분증을 보여 주지 않고
꽉 막은 경찰버스 끝 틈을 통과해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아는 아가씨에겐 더욱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아주 미인인 아가씨였는데
그 친구도 그 경찰버스 너머에 살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집에 못 가게 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경찰들이 신분증을 보여달라 요구했죠.
주소가 그 동네로 되어있으면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날 따라 신분증을 집에 두고 왔던 거예요.
할 수 없이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아가씨 신분증을 갖고 나와서
아가씨의 신분은 확인이 되어 집에 갈 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기 신분증을 안 갖고 와서
또 아버지가 간다 못 간다 옥신각신
난리가 났던 웃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가긴 했지만
가는 길에 전경들을 헤치고 가야 했는데
아가씨가 너무 미인이었던 지라
전경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 주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사건이 있었죠.

어느 날엔 집 가는 길을 막고 전경들이 버스 앞에 다 누워있었어요.
수십 줄씩 전경들로 바닥을 메꿔
즈려밟고(?) 가지 않으면
거기를 통과할 수 없이 만들어놨지요.
시위대가 통과할 수 없도록
사람장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것은
누구의 생각이었을까요?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런 상황이 싫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내 자식 같으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한 장면이었어요.

그 추운 날
모여 앉아 길바닥에서 썰렁하게 밥을 먹고 있던 모습
간식이라고 우유와 빵을 준 것을 보고
찬 속에 찬 우유를 먹으면 속이 괜찮을까
몸이 더 떨리지 않을까
저딴 것을 간식이라고 주나
속상했던 기억.

아무런 접점도 없던 이땅의 젊은이들과
대치된 상태로 만나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 너무 마음 아팠더랬죠.

그 후 헌법재판소 앞 박사모 시위는 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시끄럽고 위험해 아이들이 등교를 못할 정도였어요.
저는 그날 치과에 갔는데
헌재 앞을 통과해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는 광화문 집회와는 차원이 달랐죠.
일촉즉발 폭력시위의 위험에 사람들을 못 지나가게 
경찰들이 길을 막고 있던 거였어요.
예약 시간은 다되어 가지
길은 막혀있지
경찰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을 하나 붙여서
시위대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진압이 아닌 보호를 받고
시위대를 통과한 경험은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변화한 경찰의 스탠스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치과에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의사 선생님도 출근이 늦어
오히려 제가 기다렸다는 것.
무뚝뚝한 의사 선생님이 한껏 미안해 하며
박사모 집회 때문에 출근하다 죽을 뻔 알았다고 
귀여운 앙탈에 가까운 엄살(?)을 부렸다는 것이
저에게는 또 웃기는 일이었죠.

멀리서 고생하면서 광화문을 오가신 분들께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 살면서
편히 집회에 참여하지만
이렇듯 절대 녹록치 않은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사는 게 녹록치 않다는 게
집회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늘 이상한 마법이 펼쳐지거든요.
광화문에서는 멀어지는데
집에 가까이 갈수록
마이크 소리가 더 커지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길을 타고 바람을 타고
소리는 멀리멀리 잘 퍼져갑니다.
왜인지는 저도 모르지만요.

헬세권에 사는 사람은
시위와 소음 정도는 
늘 있는 것으로 알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0월 3일과 9일에 있었던
태극기모독집회조차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믿으며
민주시민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밤이 늦어 여기까지만 할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이야기도 써볼게요.

이상 문세권, 헬세권 사는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헬세권 통신원 오바








IP : 175.192.xxx.204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문세권
    '19.10.16 12:18 AM (39.125.xxx.230)

    고맙습니다~

  • 2. 감탄
    '19.10.16 12:20 AM (223.62.xxx.159)

    오, 원글님,
    생생하고 재미있는 얘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소음에 민감한 편인데 너그러운 마음과 생각에 한 수 배웠고요!

  • 3. 검찰개혁
    '19.10.16 12:23 AM (210.222.xxx.139)

    반갑네요 저도 헬세권 9년 살다 이사왔어요. 이명박그네 촛불 그리고 문대통령 시대 모두 겪었죠
    (진짜 고생은 문대통령때 토요일마다 고성능 앰프로 소음 공해하던 태극기 부대 ㅠㅠ)

    대통령 따라 분위기가 엄청 달라요 대통령 어디 나간다고 길 막을때 경찰들 태도까지...

    세월호 겪고 촛불 겪고 추억도 많아요. 집에서 내려가다 보면 항상 최전선에서 열혈 투사가 되어있던 ㅎ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4. 헬세권
    '19.10.16 12:27 AM (58.238.xxx.39)

    청와대, 광화문과 가까운데 사신다니 신기해요.

    전에 그분인가요?
    국군의 날 행사마치고 방금
    대통령 대구갔다 왔다는 글 올리신 분이신지요?
    헬리콥터 소리로 대통령의 일정을 꽤 알아 맞추시던 ^^

  • 5. ㅇㅇ
    '19.10.16 12:27 AM (220.81.xxx.85)

    우와 긴글인데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요. 역사적인 곳에 사시는 산 역사의 증인이시네요. 1편은 언제 쓰셨대요?
    다음 편도 기대해도 될까요?

  • 6. ...
    '19.10.16 12:35 AM (112.140.xxx.170)

    동네주민이 아니니까 민증을 못보여줬겠죠..
    동네주민이면 민증보여주고 기냥 집에갔을텐데..
    원글 보니 꼰데 태극기모독 부대생각나네여..
    경찰들 참힘들었겠네요..
    진상아줌마

  • 7. ㅇㅇ
    '19.10.16 12:40 AM (117.123.xxx.155)

    전 어렸을 때....
    최루탄이 근처에 터지는 동네에 살았었죠.
    저희 집이나 동네 사람들이나 문,창문 꼭꼭 닫고..
    수건으로 눈 코 막고 집 근처 관악산을 가도 최루탄....
    저희 부모님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셔서 그냥 냄새때문에
    힘들다고 그러셨는데,저는 왜 대학생들이 그럴까 궁금해서
    혼자 어른들 책 읽는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책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이유가 정말 궁금했어요.

  • 8. 00
    '19.10.16 1:01 AM (220.120.xxx.158)

    이런글에서도 꼬인 댓글을 다네요
    원글님 글 잘 읽었습니다

  • 9. 저는
    '19.10.16 1:09 AM (211.59.xxx.184)

    그 경찰버스들 뒤에서 식당을 했지요. 전형적인 주말상권이라 화수목 널널하게 지내가 금토일 광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손님받고 나면 월요일에 하루 쉬는 그런 상권...그 중에서도 최고는 토요일로 평일 매출 3배가 이 하루에 해결되었어요. 연일 집회가 거듭되고 일정 시간이 되면(기억으론 3시나 4시경)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어요. 너무나 갑자기 툭 끊겨서 기이할 정도였죠. 인근 상인들 하나 둘 밖으로 나와서 텅빈 거리를 보며 망연자실하곤 했어요. 날은 춥고 마음은 힘들고 통장도 비어가고. 몇 번 하다 끝날 줄 알았던 집회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ㅜ허망한 하루를 접고 나면 집으로 가는 길도 막막했죠. 도로가 막혀 차가 갈 길도 없었고 버스도 다니지 않고..40-50분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눈물이 콧물과 범벅이 되어 쏟아졌어요.
    엄한 집회참석자들을 원망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 했어요. 매출이 반토막이 나는데 제정신으로 버틴다는 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그로부터 6개월 후 계약기간이 끝날 때 저흰 연장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경찰버스 뒤 동네는 안 된다며. 모두가 승리의ㅜ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때 저희 역시 그 현실을 반겼지만 자영업자로서는 너무나 추운 겨울이었기에 저는 아직도 그 동네를 못 갑니다. 너무 아파요 ㅠㅠ

  • 10. 헬세권
    '19.10.16 1:17 AM (122.39.xxx.248)

    혼자서 헬세권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문세권 전..닭세권일땐 혼자 걸어가면 가방까지 검색..ㅡ.ㅡ
    지금은 썬구리 쓰고 당당하게 산책하듯 갈수 있네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584856 남편 생일 까먹었어요 2 2024/04/13 1,085
1584855 중년 하객룩 뭐가 좋을까요? 6 good 2024/04/13 2,210
1584854 이번 냥이 사건이요 강쥐 키우는 분들께도 알려주세요 12 아오 2024/04/13 1,529
1584853 1년 지난 두릅간장장아찌 버려야하겠죠? 6 아까비 2024/04/13 1,276
1584852 한동훈 고별사 보셨어요? ㅋㅋㅋ 75 ... 2024/04/13 20,104
1584851 케이블에서 예전 수사반장 해줘서 보고있어요 1 수사반장 2024/04/13 525
1584850 고양이 사료 정리해 드려요 3 ㅇㅇ 2024/04/13 1,812
1584849 남편 실직시 제가 알바해 건보료 5 건보 2024/04/13 2,599
1584848 세월 빠르네요 1 2024/04/13 783
1584847 민주당대통령이 잘할수 밖에 없는 거 같아요. 13 .. 2024/04/13 3,144
1584846 방울토마토 샀는데요. 5 ... 2024/04/13 1,570
1584845 임영웅 콘서트 예매 성공했는데요 6 ㅇㅇ 2024/04/13 2,841
1584844 결기 22주년이네요. 15 오늘 2024/04/13 2,172
1584843 실용음악과 전공쌤은 클래식 못가르치시죠? ㅡ 피아노 2 실요 2024/04/13 982
1584842 콜라겐 무릎에 효과있나요? 11 40대중반 2024/04/13 1,493
1584841 길냥이들 사료 케츠랑 키튼 추천요 40 :: 2024/04/13 1,070
1584840 미생물 음식물처리기 써보신 분~ 10 ㄴㄴ 2024/04/13 799
1584839 두부 계란 콩 닭가슴살 생선 외에 단백질 많은 식품 알려주세요 .. 14 2024/04/13 1,977
1584838 멸치볶음 어렵네요 21 무념무상 2024/04/13 2,837
1584837 금쪽이ㅡ지난주 /이번주가 다른사람인가요? 15 질문 2024/04/13 5,170
1584836 공덕 마포 용산지역 안과 여쭤봅니다 5 메리 2024/04/13 598
1584835 어제밤부터 왼쪽 갈비뼈끝나는곳이 아픈데요 2 .. 2024/04/13 585
1584834 Pt 한달 푹빠짐 15 ㅜㅜ 2024/04/13 3,675
1584833 바쁘다는데도 자꾸 빨리 만나자는 친구 6 .... 2024/04/13 1,994
1584832 가족과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16 . . .... 2024/04/13 3,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