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Banner

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

길벗1 조회수 : 904
작성일 : 2019-05-20 12:56:04

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

 

 

2019.05.16.

 

또 다시 5월, 어김없이 5.18은 다가오고, 그리고 또 어김없이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주장만 난무한 증언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온 언론들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들어도 이에 대해 정면에서 반박하는 양심과 용기를 가진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찾기 힘듭니다.

선동은 단 한 마디로 가능하지만, 그 선동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데는 천 배, 만 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지요. 문제는 노력과 시간이 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 5.18로 밥벌이 하는 자, 5.18이 정치적 자산이 되고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의 자양분이 되는 자, 5.18의 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 의한 집단 다구리가 선동을 반박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훨씬 큰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겁박과 집단적 이지메가 두려워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3월 15일, jtbc는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라고 자처하는 김용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김용장은 jtbc 출연에 이어 5월 13일에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하는 특별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어 5/16에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도 출연하고, 광주로 내려가 이용섭 광주시장도 만나고 광주 국군통합병원도 찾았다고 하는군요.

김용장이 피지에서 귀국해 증언하게 된 것은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인 홍기섭의 설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모습들에서 왕진진(전준주)과 윤지오의 그림자가 보이고, 최근에 벌어진 장자연 사건 재수사 데자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

검찰 과거사 진상 조사위원회가 캐나다에 있는 윤지오를 설득해서 왕복 비행기 값에 숙박료까지 지급하고 경호까지 붙여주며 귀국하게 해 증언토록 한 것이나, 안민석이 윤지오에게 국회에서 출판기념회 자리를 마련해 준 것, jtbc 손석희가 윤지오를 ‘뉴스룸’에 초대해 장시간 인터뷰하고, 김어준도 ‘뉴스 공장’에서 인터뷰해 준 것, MBC, KBS 등 모든 언론들이 앞 다투어 윤지오 증언을 대서특필한 것, 윤지오의 증언과 인터뷰에 왕진진의 가짜 편지 내용이 혼재해 있는 것, 윤지오의 증언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총괄팀장(김영희)는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설레발 친 것 등과 오버랩 됩니다.

윤지오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져 오히려 장자연 사건 규명을 방해했는데 김용장의 증언의 결과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제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데는 그 동안 읽어 본 5.18 관련 기록들과 김용장의 증언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용장의 주장이 100%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동안 5.18 단체가 주장했던 것과 검찰, 국방부가 수사해 발표한 보고서 내용과 모순되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낮 12경에 광주에 내려와 긴급회의를 하고, 이 자리에서 시위대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 직후 오후 1시경에 전남도청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앉아 쏴 자세로 일제 사격을 해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5월 20일, 일명 ‘편의대’라는 특수부대원들이 가발과 사복을 입고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시위 군중에 섞여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시위대를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600명이 했다는)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전남지역의 무기고를 터는 등 총격, 방화 행위로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할까요?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기록, 1995년 검찰의 수사 보고서, 5.18 단체들의 주장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1. 전두환은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갔는가?

 

먼저 1980년 5월 21일 낮 12시에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두환은 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왔습니다.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 가량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저는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라고 봅니다.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이 전달됐다고 믿습니다. 이건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참고로 발포명령과 사살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 플랜, 즉 비행계획서가 분명 공군에 남아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당시 공군 보안부대원 중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날 전두환은 서울에 있었고, 광주에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당시 계엄군의 조직 편제는 대통령(최규하)-국방부장관(주영복)-계엄사령관(이희성 육참총장)-2군 사령관(진종채)-전교사령관(윤흥정)-31사단장(정웅)으로 되어 있었으며, 광주에 계엄군으로 파견된 공수부대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계엄군의 조직 라인에 따라 명령과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수사보고서 201페이지 ‘(2)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 항목을 보면 명확하게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지휘권이 이원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참고) 1995년 검찰의 수사 당시 수석 검사가 채동욱이었고, 채동욱이 전두환을 사형 언도 받게 재판정에서 심문했습니다. 이 수사보고서도 당연히 채동욱이 직접 조사한 결과물입니다. 채동욱은 호남 출신이고 좌파 진영에서 ‘까도 까도 미담만 나온다“고 청문회에서 칭찬하던 인물입니다. 채동욱이 전두환에게 일부러 유리하게 수사 보고서를 쓸 이유가 전혀 없겠죠.

 

그러면 1980년 5월 21일, 계엄군 지휘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까요?

광주지역 계엄을 관리하던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0일부터 광주시의 시위사태가 격화되어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오전에 김준봉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광주를 방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습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어 자위권 발동이 필요하니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동문제를 건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위권 발동의 첫 건의자가 현지 지휘관인 호남출신 윤흥정 사령관이었습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은 바로 서울로 가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지시해 주도록 건의했습니다. 이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종채 2군 사령관과 함께 장관실로 갔습니다. 장관실에는 주영복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전두환),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정호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소요사태의 실상을 보고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 불가피함을 건의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군 수뇌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주영복 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1일 19시 30분경 “광주사태에 관련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5.18 기록관‘ 등 5.18 단체들이 인용하며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개입의 근거로 삼는 <5공 전사>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5공 전사>에는 “2군사는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께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장관실로 갔다. 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지역을 담당했던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서울로 올라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했고, 그 때 전두환(보안사령관)과 정호용(특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실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 김용장은 전두환이 5월 21일 낮 12시경에 광주로 내려와 광주공항 K57 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과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미상 1인과 회의를 하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서울에 있었던 전두환과 정호용이 어떻게 광주에도 존재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이재우 보안부대장과 미상의 1인과 미팅하고 그 자리에서 사살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살 결정을 내리려면 최소한 그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전 전교사령관, 정웅 31사단장이 있는 자리여야 하는데, 정호용과 이재우 보안부대장만 모여 결정하고 시행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리고 정호용도 당시 광주에 내려갔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는데 어떻게 정호용이 광주 K57 비행단장실에 그 시간에 있을 수 있습니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왔다는 증언은 김용장 말고도 현재 둘이 더 있습니다.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와 505 보안부대원 허장환입니다.

오원기는 5월 1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jtbc 손석희와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출신 오원기의 인터뷰>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17326

[오원기/5·18 당시 공군본부 보안부대장 운전병 : 미8군 헬기장으로 빨리 가자고 해서 가니까 헬기는 도착해 있었고. (전두환) 사령관 혼자 타고, 수행원 없이 전두환 씨 혼자 갔어요.]

오원기는 전두환이 혼자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고 주장하는데, 이번에 김용장을 피지에서 귀국하게 한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 홍기섭은 전두환이 광주로 내려갈 때 3인이 동승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래는 홍기섭이 MBC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앵커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MBC와 홍남선 변호사 아들 홍기섭의 인터뷰 내용>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

 

☎ 진행자 >이 부분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동안 전두환 씨는 광주에 간 적이 없다고 해오지 않았습니까?

☎ 홍기섭 >그 부분은 본인은 계속 거부하였으나 김용장 선생님의 증언이 토대가 되어 국방부 자료에 5월 21일 그 모든 헬기 탑승자는 명단이 다 기재가 되게 돼 있습니다.

☎ 진행자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 홍기섭 >네, 그런데 그 날만 21일 날 출발한 전두환 씨가 타고 있던 헬기만 안보요인 3인으로 기명이 안 돼 있었습니다. 무기명으로. 유일하게 그 날 전두환 씨가 타고온 헬기만.

☎ 진행자 >그러니까 5월 21일 날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게 있었는데 그냥 안보요인,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거군요.

☎ 홍기섭 >네, 안보요인 3인으로 돼 있었습니다.

☎ 진행자 >3인으로. 그래서 이제 이 3인 중에 한 명이 전두환 씨일 것이다 라고 얘기하시는 거고,

☎ 홍기섭 >그건 확실합니다.

 

홍기섭은 전두환이 탔던 헬기에는 안보요인 3인이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오원기는 전두환 혼자만 헬기에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거나, 둘 모두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이 맞다고 보십니까? 홍기섭은 그나마 국방부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오원기는 물적 증거 없이 단지 자신의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허장환의 주장에 대해서는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과 이재우 전 505보안부대장이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검찰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반박했습니다.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1995.6.5 검찰 진술조서)>

문: 일부 고소인들과 당시 505부대의 수사관이던 허장환 등은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K-57비행장을 통해 광주로 와 전교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귀경한 직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정호용, 윤흥정, 부사령관 김기석, 참모장인 진술인, 3개 여단장, 505부대장 등이 참석하에 회의를 열어 정호용과 여단장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이던 백남이는 93.5.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시 5.22 전두환이 내광하여 전교사로 왔으며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비행장 도착과 전교사 출발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바도 있으며, 5.27 작전개시 전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교사를 방문하였는데 자신은 노 사령관의 얼굴을 본 사실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가 그 당시나 사후에라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저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며, 참고로 당시 전교사의 주요 간부들 즉 윤흥정 사령관, 김기석 장군, 저, 김순현 장군, 임헌표 장군과 백남이 대령 등 전교사의 대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인 “무등회” 라는 것이 있어 거의 매월 모임을 가지고 있는 바 백남이의 인터뷰 직후에 백남이도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 기사를 화제 삼아 백남이에게는 물론 참석자들끼리 서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당시 백남이도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궁을 하기도 무엇하여 넘어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중략)

문: 백남이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이유가 있는가요.

답: 저가 말씀드리기는 무엇 하지만 통상 전교사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승진을 할 수 있는 보직으로 여겨졌음에도 백남이는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광주사태를 조기진압하지 못한 데 대해 당시에도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 사실이 있음) 5.24 교도대와 공수부대의 오인사격에 대해 백남이의 상황전파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사태 직후 징계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이 되며, 이와 같은 일과 함께 저의 기억상으로도 노태우 사령관이 사태 후에 보안사령관이 되어 광주와 전교사에 한 번 온 사실이 있는데 이를 착각하여 증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재우 전 광주보안부대장(95.1.20 진술조서)>

문: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의 양심선언(김영진 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권, 228정 이하)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률 중령이 5.18 오후에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내려와 5.20 저녁에 상경한 바 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홍성률 중령이 광주에 내려 왔던 것은 사실이나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5.21 이후에 보안사령부로부터 광주시내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광주 시내에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5.27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 상경한 것입니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문: 5.21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는 광주시내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안부대 활동망, 경찰 정보망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여서 광주시내의 상황에 대하여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서 홍성률 중령을 내려보낸 것이며 진압작전과 관련해서는 작전부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침투시켰었다는 사실을 진압작전이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5.18 단체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호남일보의 기사입니다.

 

“‘5.18 기록관’은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집단발포가 이뤄진 직후 '자위권 발동과 계엄군 광주외곽 배치'와 관련한 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확인했다. 같은 날 오후 2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시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전씨 등이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봉쇄한 뒤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자위권을 발동, 신속히 진압키로 했다는 내용이다.”

http://www.honam.co.kr/read.php3?aid=1542898800570449011

 

‘5.18 기록관’도 전두환이 5월 21일, 오후 2시 35분께 서울의 국방부장관실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5공 전사>에 나오는 내용과도 일치하지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도 최보식 조선일보 기자와 최근 대담에서 전두환은 5.18과 관계없다고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또한 1988년,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7차(제144회)에 있었던 이해찬과 이희성(계엄사령관) 간에 질의-응답한 자위권과 발포명령 관련해 이희성이 답변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희성은 당시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음을 증언하고 자위권도 위수령 제15조1항(대통령령 제4949호)에 의거 정상적으로 행사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위권 행사는 ‘군인복무규율 제34조’에 의해서도 그 정당성이 담보됩니다.

*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의 자료는 ‘5.18 기록관’에도 나오니 직접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現 위수령 제15조>

제15조 (병기사용한계) ①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병기를 사용할 수 없다.

1. 폭행을 받아 자위상 부득이 한 때

2. 다중성군하여 폭행을 함에 즈음하여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진압할 수단이 없을 때

3. 신체·생명 및 토지 기타 물건을 방위함에 있어서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방위할 수단이 없을 때

②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가 병기를 사용하였을 때에는 즉시 위수사령관에게 보고하여야 하며, 위수사령관은 이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現 군인복무규율 제34조>

제34조(초병의 무기사용) ①초병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하여 휴대하고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개정 1998. 12. 31.>

1. 신체ㆍ생명 또는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

2. 야간에 3회 이상 수하하여도 이에 불응하여 대답이 없거나, 도주하거나, 초병에 접근할 때

3. 폭행을 당하거나 또는 당할 우려가 있는 경우 그 상황이 급박하여 자위상 부득이할 때

②초병은 지휘계통상의 상관의 명령이나 지시없이 휴대하고 있는 무기나 탄약을 타인에게 넘겨주어서는 아니 된다.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광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김용장은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린 직 후인 오후 1시에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앉아 쏴‘ 자세로 일제 사격하여 시위대를 사살(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오후 1시를 전후한 전남도청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 중에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1995년 이 사건을 수사하고 전두환을 사형 선고 받게 한 인물이 채동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이 검찰 수사보고서에 대해 의문이 있으시다면 채동욱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검찰 수사보고서가 사실과 다르다면 여러분들은 채동욱에게 그 책임을 먼저 물으시기 바랍니다.

 

-. 5.21. 08:00 : 전남도청 앞에 수 만명의 시위대가 사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시위.

-. 10:00 : 시위대 대표 4명, 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 11:00 : 장형태 도지사 시위대 앞 연설 포기하고 헬기로 시민 자제 요구 방송.

-. 12:00 : 공수 부대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 저지,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의 백여 대 차량으로 공수부대 저지선 압박.

-. 13:00 : 시위대가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 투척,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 공수부대의 저지선 무너지고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 사망.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 건드려 공중 발포.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의 일환으로 스피커 통해 애국가 방송하며 해산 호소.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하여 버스 운전자 1명 사망.

-. 13:30 : 시위대쪽에서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돌진하자 경계중이던 공수부대원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청년 1명 피격.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카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임.

-. 13:00~15:35 : 시위대, 광주 인근 전라 지역 파출소, 지서, 경찰서, 광업소, 화약고, 한국화약 등에서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백 7십여 발 탈취.

-. 14:45 : 61항공단 UH-1H 헬기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 피격.

-. 14:50 : 시위대 장갑차 전남도청 광장쪽으로 돌진, 공수부대 발포로 후퇴.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 배치하여 도청 부근 접근하는 시위대에 총격.

-. 15:00 : 남평지서에서 무기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 도착.

-. 15:15 :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천명 모여 칼빈과 실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

-. 15:50 :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하면서 이동.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하던 헬기 시위대 대공사격 6발 피격.

-. 16:00 :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 칼빈 분배.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 헬기 향해 사격.

윤흥정 전교사령관, 공수부대 전남도청 철수 지시.

-. 16:30 : 전남도청 상황실 폐쇄.

-. 17:00 : 공수부대 전남도청에서 철수 시작.

-. 17:15 : 전남도경 상황실 폐쇄, 경찰 병력 철수 시작, 전경들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철수.

-. 20:00 : 전남도청 시민군에 의해 접수됨.

 

시위대에 대한 사살 명령을 하달 받은 계엄군(공수부대)이 실탄을 제대로 지급 받지도 못하고, 무장 시위대에 밀려 전남도청과 전남도경에서 철수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살 명령을 받은 정예화된 우리나라 최고의 부대인 공수부대원들이 훈련받지 않고 조직화 되지 않은 민간인들의 공격에 저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 있을까요? 공수부대원들이 사살 명령을 받은 상태라면 과연 그 날 전남도청 인근에서 사상자가 그것 밖에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그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포함한 계엄군들 중에 지휘관이든 사병이든 사살 명령은커녕 발포 명령을 받았다거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요? 사살 명령을 받았거나 지시했다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 편의대는 남한 특수군으로 광주 시민들을 과격 행동하게 유도했나

 

다음으로는 김용장의 두 번째 주장, ‘편의대’를 광주 시내에 보내 총격, 방화, 유언비어 유포하여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무장난동을 유도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명 ‘편의대’라 불리며 시민 행세를 했던 사복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5월 20일쯤 K57 광주비행장으로 왔습니다.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약 30~40명이 왔으며, K57 격납고 안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침투했습니다. 

저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30대에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습니다.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서의남 505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당시 보고 내용입니다. 이들이 온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북한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에 어려운 극렬 행위들은 바로 이 편의대, 저는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남한 특수군이 선봉에서 시민들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확산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입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든 후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고도의 공작을 펼친 겁니다.

이들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광주의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5.18 당시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유사한 조직이 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대는 김용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하고 총격, 방화, 탈취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 편의대가 투입된 것도 김용장이 말하는 것처럼 5월 20일이 아니라 5월 26일입니다.

편의대는 계엄사가 전남도청을 탈환하고 광주를 장악하여 사태를 진압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하고, 작전이 개시되는 5월 27일 새벽 이전에 전남도청 및 광주일원의 상황을 파악하고 무장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태, 경계 상황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투입한 것입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전남도청 지하에 있었던 도청을 날려버릴 수 있었던 량의 TNT 뇌관도 사전에 제거하였고, 피해를 최소화하여 진압작전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김용장의 주장처럼 방화, 총격, 탈취 등 극렬 행동을 할 이유도 없었고, 또 그런 임무가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투입된 시기도 이미 광주가 무장 시위대에 장악된 뒤인 5월 25일과 26일이었습니다.

‘5.18 기록관’도 인용하는 <계엄사> 160쪽에는 이런 요지의 기록이 있습니다.

 

“5월 27일 새벽을 기해 광주재진압작전이 시행됐다. 3공수는 30명 특공조를 편성해 전남도청을 01:00부터 05:10에 점령했다. 제7공수는 262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광주공원을 01:00부터 05:06에, 제11공수는 37명으로 특공조를 편성해 01:00부터 04:40에 점령했다,(주: 사망자는 150명이라는 예측치와는 달리 17명으로 종결됐다)

"정보수집원들은 가발을 쓰고 민간복장을 하고 침투해 어느 건물 어느 장소에서 어느 규모의 난동자들이 활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는 광주재진입작전을 펼치기 전에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정보 수집차 사전에 투입한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보요원이었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관련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5.25. - 전남도청 진입작전 준비 상황)

O 5.25. 04: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이에 따라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이 작성되었음.

O 14:30경 계엄사 탄약검사반이 은밀히 전남도청에 투입되어 수류탄 278발, 최루탄 170발을 분해하였음.

 

(5.26. - 진입작전 준비상황)

O 21:00경 전교사 문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하였고, 같은 시간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가발과 민간인 복장을 공수하여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하였으며, 22:40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5.27. 새벽 진입작전을 개시할 예정임을 보고하였음.

 

(5.27. - 전남도청 진입작전 상황)

O 5.26. 23:00경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 운동장, 조대부중, 조대여고, 전남기계공고, 조대앞, 노동청을 거쳐 5.27 04:00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진입하여 05:21 전맘도청 점령을 완료하고, 07:30경 20사단 61연대에 전남도청을 인계한 후 08:00경 부대로 복귀하였음.

O 7공수여단은.....(중략), 11공수여단 특공조.....(중략)

O 20사단은....(중략) , 31사단은 .... (중략)07:25 계획대로 작전 완료하였음.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p197~ )

(1) 발포 경위

-.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장갑차를 탈취하고 방화, 총격한 외부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5.18의 성격 규정을 다시 해야 하며, 5.18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물론 5.18에 대한 엄밀한 재수사가 즉시 실시되어야 하겠지요. 필요하다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진실 규명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김용장의 주장으로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이 새삼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김용장과 지만원은 탈취, 총격, 방화로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상황 악화를 유도한 세력이 있다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주장이 다른 지점은 그 주체를 김용장은 남한군(편의대), 지만원은 북한군 600명이라고 지목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용장의 주장도, 지만원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전두환이 사전에 계획하고 편의대를 군중에 투입하여 그 짓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전두환과 그 일당을 재판정에 다시 세우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반인륜적이며 극악무도한 파렴치한 죄로 고령이라고 봐 줄 문제가 아닙니다.

반면에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김용장은 물론 김용장을 부추킨 사람들과 세력들은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 참고로 설갑수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김용장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기고]‘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61603001&code=...

 

* 아래는 ‘5·18 참상을 세계에 알린 사람'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와 피터슨 목사의 5.18 광주사태에 대해 썼던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5.18의 실상이 다 알려진 1995년 이후에 저술된 것인데도 이렇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책에 담아 진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5.18 당시 헬기 기총 소사가 있었다고 증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검찰 수사 결과 피터슨의 증언은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었지요.

 

"5월 21일에 이르러서는 광주지역의 수십만 시민들이 군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냈고 그 후 5일간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원회가 이 도시를 통제했다. 이 위원회는 500명이 이미 죽었고 약 960명이 실종되었다고 확인했다.[각주: 이 수치는 하비(pharis Harvey) 목사가 이끄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감시단체인 ‘한국 인권 감시 북미 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on Human Rights in Korea)에서 1980년 9월에 집계한 것이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창비, 2004)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만 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천 명이었다. 이들 2천 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두 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0명 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 수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5.18 광주사태』 아놀드 A. 피터슨 목사. 정동섭 옮김, 1995년)

* 해당 관련 기사

1. <3/15, jtbc -전두환, 5·18 발포명령 개입했나…"광주 방문 조사해야">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784281

 

2. <5/13, 더불어민주당 주최, 김용장 국회 특별 기자회견 전문>

https://blog.naver.com/kopark2012/221536341940

http://facttv.kr/facttvnews/detail.php?number=25113&thread=14r08

 

3. <5/16,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김용장 “5·18, 전두환의 정권찬탈 위한 시나리오.. 美도 알았다”>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671

 

4. <김용장 - "계엄군, 5·18 희생자 시신 소각…일부는 바다에 버렸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55&aid=000...

 

5. <MBC - “미국은 5.18 미리 알고 있었다”, 김용장 추가 증언 할까?>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

IP : 118.46.xxx.145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9.5.20 1:00 PM (1.231.xxx.146)

    .

  • 2. ..
    '19.5.20 1:03 PM (108.41.xxx.160) - 삭제된댓글

    '
    '
    '

  • 3. ...
    '19.5.20 1:16 PM (223.62.xxx.240)

    .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934643 혈압잴때요 9 혈압 2019/05/21 2,070
934642 롯#마트 골드키위. 몇개나 담으셨어요? 5 초집중 2019/05/21 2,045
934641 6월 말경에 갈만한해외여행지 어디가 있나요? 8 떠나자 2019/05/21 994
934640 중3 고등과학 문의드립니다 3 .... 2019/05/21 1,131
934639 남편을 친구앞에서 얘기할때 높이나요? 25 아쫌 2019/05/21 2,880
934638 아무리 익명 자게라지만 20 ㅇㅇㅇ 2019/05/21 4,086
934637 욕실바닥 등 타일 광택 내는 방법이 있을까요? 욕실아깝다 2019/05/21 552
934636 외할머니 병수발 엄마가 들고 있는데요. 17 ........ 2019/05/21 7,193
934635 스페셜리스트면 직급이 어느정도죠? 3 라쿠나 2019/05/21 2,196
934634 구해줘 홈즈보니까 저도 혼자 나가 살고 싶어요 2 다귀찮 2019/05/21 2,386
934633 김성령 단발머리 정말 어울려요 6 헤어스타일 2019/05/21 3,886
934632 씨에프로 뜬 스타 누가 있나요? 18 2019/05/21 2,079
934631 아우라라는 거 참 신기하네요 21 Aura 2019/05/21 11,391
934630 다이어트는 하지만 초콜렛은 먹고 싶어(나름 영화제목? 패러디?).. 4 다이어트 2019/05/21 1,252
934629 쟈스민님 블로그 10 자스민 2019/05/21 10,702
934628 지난 번에 고운발크림 소개해 주신 분 너무 감사해요. 14 ........ 2019/05/21 3,950
934627 이 원피스 어디걸까요? 7 서영 2019/05/21 2,683
934626 82가 싫어하는 여자들 13 ㅋㅋ 2019/05/21 3,486
934625 도수없는 안경쓰는데 안경알 중요한가요? 6 ... 2019/05/21 2,911
934624 시인 백석 18 ........ 2019/05/21 2,845
934623 대구미술관근처 밥 먹을데있나요? 3 ㄴㄱㄷ 2019/05/21 710
934622 저만 추운가요? 13 추워 2019/05/21 2,725
934621 날씨너무 좋네요 강아지랑 산책다녀왔어요 4 ㅇㅇ 2019/05/21 1,217
934620 고대안암병원 스벅 자리에 뭐 들어왔나요? 2 둘째 2019/05/21 1,259
934619 좀 춥다싶음.. 위장 운동이 멈추는듯 하고 3 43 2019/05/21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