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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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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울린 치매할머님들

ooo 조회수 : 4,285
작성일 : 2017-07-22 15:40:33

엄마가 치매 판정 받으시고 구청 치매지원센터에 다니세요.

아직 초기라 등급 판정 못 받으신 초기치매분들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인데

시설이나 프로그램 내용 모두 훌륭해서 엄마도 저도 만족하며 다녀요.

 

비용은 모두 무료이고 대신 한달에 두 번 보호자 자원봉사를 가야해요.

아침 10시부터 오후4시까지 같이 수업 참관하며 뭐 이것 저것 거들어드리는거예요.

 

사실 저희 엄마가 전형적인 엄마는 아니어서 평생 엄청나게 상처 받으며 자랐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이로 인한 자존감 문제, 대인관계, 심각한 우울증으로

두 달 전부터 상담치료 받으러 다니는 중이라 엄마와의 관계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루종일 엄마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어서 몹시 부담되었지만

보호자가 꼭 참여해야 한다니 어쩌겠어요.

 

수업 참관은 처음이었는데

뇌체조 따라하는 것도 제대로 하시는 분 없고

매일 뵙고 인사드렸는데도 "아이고, 이분은 누구신가?" 하시면 또 일일이 인사 드려야 하고 ㅜㅜ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던 할머니들이 죄다 마치 아직 할아버지 살아계신 것 처럼

남편 흉보고 싸운 얘기하시고 ㅜㅜ

강사분이 한 시간에 한번씩 오늘이 몇 년 몇 월 몇 일이지요? 물으면 아무도 대답 못 하시고 ㅜㅜ

보고 있노라니 가슴 답답하고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지는데 요리 시간이 되었어요.

 

대개의 자식들이 치매 판정 받으면 주방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하지요.

어차피 요리법도 다 잊어버리셔서 음식을 만드는게 불가능한데다

칼이나 가스 같은 사고 위험이 있어서 저희도 엄마에게 절대 음식 안 시키거든요.

 

지난주엔 카레를 만들어 점심으로 드셨다던데 이번주 메뉴는 오이 초밥이었어요.

속으로 저거 은근히 손 많이 가는 메뉴인데 할머니들이 하실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각자 오이, 양파, 맛살, 피클 등의 재료를 나눠주고 아주 잘게 다져달라고 시키니

어머 세상에.......ㅠㅠ

 

안전 사고 때문에 아주 무디고 잘 들지도 않는 과도를 나눠드렸는데

올해가 2017년인줄도 모르고 자기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오락가락 하시던 할머님들이

야무진 손놀림으로 일사분란하게 착착 다져내시는데 깜짝 놀랐어요.

칼질 끝내고는 티슈로 도마며 테이블을 말끔하게 싹 닦아 내시는데

정말 이건 평생 몸에 배어있는 거라고 밖에는 할 수 없더라구요.

 

이렇게 늙고 병들어 자신도 잊어버릴만큼 치매라는 병에 잠식당해

이 집안 저 집안 자식들의 우환덩어리가 되어버리신 이 할머님들이

평생 주방에서 자식들 입에 들어갈 음식들 해내느라 종종걸음치던 우리 엄마들이구나.

저 손 끝에서 얼마나 많은 요리들이 만들어졌을까.

평생 해댄 밥이며 국이며 반찬들........

자식들 먹이겠다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방에서 보냈길래

자기 자식, 손주 이름도 기억 못해 입에 뱅뱅 돌기만 할 지경인데도 손은 저리도 정확히 기억하는걸까.

 

요리 끝나고 이렇게 맛있는거 처음 먹어봤다며 너무 신나게 식사하시고

사과를 무슨 색으로 칠해야 할지, 풀칠을 앞에다 하는건지 뒤에다 하는건지 우물쭈물 하는

해맑은 아이들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셨지만 너무 마음 아파서 화장실 가서 몰래 울었어요.

 

인생의 끝자락이 이런 모습이라면 너무 서글픈거 아닌가요.

그 힘들고 모진 인생을 살아냈는데 자기 자신마저 기억 못하고

다시 아이로 돌아가 생을 마쳐야 한다는게 너무 억울하실듯 해요.

 

저도 저에게 상처만 줬던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엄마의 인생을 모두 포용하고 안아드릴 수 있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그 어떤 심리상담사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IP : 116.34.xxx.84
2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님에겐
    '17.7.22 3:43 PM (116.127.xxx.143)

    가슴아픈 사연이겠으나,,
    글 읽는 저는 한편의 영화 같은 느낌이 드네요....

    처음은 코미디
    다음은 감동..
    다음은 생의 의미....

  • 2. 감동
    '17.7.22 3:46 PM (59.17.xxx.136)

    감동이예요....매일 하는 밥 지겹다 생각했는데...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 3. ㅜㅡ
    '17.7.22 3:53 PM (175.115.xxx.92)

    눈물 주룩,,

    한편의 생활수필,,

  • 4. 아이고
    '17.7.22 3:56 PM (125.184.xxx.67)

    눈물이.

    이런 장면에서 삶을 그려 내는 님이 대단해보입니다.
    분명 마음이 곱고 여리신 분이시겠죠?
    엄마에게 받은 상처 잘 치유 받으시고
    앞으로 행복하시길 빌게요.

  • 5. 님이 더 대단해요
    '17.7.22 4:01 PM (221.167.xxx.125)

    볼수없는 부분을 보는 님이 더 존경

  • 6. ㅇㅇ
    '17.7.22 4:08 PM (121.168.xxx.41)

    요리 못하고 흥미도 없는 나는
    치매 걸리면 뭘 무의식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해야 되나..

  • 7. ..
    '17.7.22 4:15 PM (118.200.xxx.14) - 삭제된댓글

    치매걸린 할아버지가 피아노 치는거 책에서 봤어요.
    몸으로 익힌건 잊지 않는거 같은데..
    글 읽다가 울컥했네요. ㅠㅠ

  • 8. ㅠㅠ
    '17.7.22 4:28 PM (112.184.xxx.17)

    나는............

    매일 멀쩡한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거 아닐지...
    아 슬프다.

  • 9. 민들레꽃
    '17.7.22 4:31 PM (223.62.xxx.25)

    에효~~~~눈물나네요.
    영화같이 장면이 보이는거 같아요.

  • 10. ...
    '17.7.22 4:45 PM (39.120.xxx.165)

    할머님들은 원글님 울리고
    원글님은 우리 울리고 ㅠㅠ

  • 11. 새옹
    '17.7.22 5:26 PM (1.229.xxx.37)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이런 경험담들 모아서 산문집 같은거 내셔도 될거 같아요

    너무 감동입니다

  • 12. 진심으로
    '17.7.22 5:36 PM (210.221.xxx.239)

    블로그 같은 거 하나 만드셔서 죽 올려보세요.
    치매부모와 같이 사는 자식들에게도 힘이 될 것 같아요.

  • 13. 아...
    '17.7.22 5:36 PM (211.229.xxx.232)

    원글님 ㅜ
    글 읽다보니 글이 주는 묵직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이란게 이런거구나 싶네요...
    치매란게 누구나 (가족이건 당사자이건) 겪을 수 있는 일이라 마음이 참...아려옵니다.
    엄마란 존재가 그런거 같아요...
    늘 강인한 존재라고 여겨지다가 또 한없이 약할수도 있는 여자란걸 깨닫게 될때쯤이면 내가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어있더라구요...
    원글님도 지금 여러가지로 힘드실텐데 그래도 힘내시고요, 이렇게 좋은글... 가끔이라도 올려주세요 ^^
    어머님 빨리 완치되시길 바랍니다~

  • 14. ..
    '17.7.22 5:45 PM (183.96.xxx.12)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따님분도 힘내시고 어머니 잘 도와주시리라 응원합니다

  • 15. 쓸개코
    '17.7.22 5:51 PM (211.184.xxx.219)

    아.. 눈물납니다.
    따듯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써주시니 감동이 절로 오네요.
    원글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 16. 공감
    '17.7.22 5:52 PM (182.216.xxx.163)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저희 친정엄마도 치매 초기이고 약을 드시고 계세요
    그래서 더 와 닿는지도 모르겠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17. 하~
    '17.7.22 6:04 PM (222.233.xxx.7)

    진정성 있는 글이 주는
    이담담한 감동...
    저의 미래는 어떨지...ㅠㅠ

  • 18. ...
    '17.7.22 6:36 PM (211.117.xxx.14) - 삭제된댓글

    원글님이 과거를 극복하고 행복해지시길 빌어요

  • 19. 천사
    '17.7.22 6:46 PM (175.119.xxx.55)

    요즘 읽고있는책이 "엄마의 기억은 어디로갔을까?"입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있는 엄마를 둔 딸의 기록인데 먹 먹하니 나에게도 일어날 수있는..그래서 마음의 준비도하게하는 ...한번씩 읽어보셔도 좋을것같네요

  • 20. 연율맘수진
    '17.7.22 8:13 PM (14.40.xxx.226)

    글 읽으며 저도 눈앞이 흐려지네요.
    글을 너무 잘 쓰시네요 정말^^

    더불어 원글님 어머님도 좋아지시길 바래봅니다.

  • 21. ㅇㅇ
    '17.7.22 10:29 PM (180.228.xxx.27)

    예전 다큐본적있는데 치매병동이었어요 할머니들이 하루종일 빨래개던모습보고는 나도 나중에 저럴까싶었는데

  • 22. ㅜㅜ
    '17.7.22 11:07 PM (58.230.xxx.25) - 삭제된댓글

    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오랜만에 읽는 진정성 담긴 글이라 더 감동적이에요

  • 23. 아...
    '17.7.23 3:35 AM (24.57.xxx.110)

    저를 울리시나요. 치매 할머니들의 지나온 삶의 궤적이 그려지면서...
    삶이란 시간이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운명이란 뭘까 이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네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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