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광화문의 바보 목사!

눈꽃새 조회수 : 1,806
작성일 : 2014-09-19 02:23:27

저는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종교라는 문제에 답이 있는지, 또 답이 있다면 그게 유일한지 통 모르겠습니다. 그저 풍경이 수려한 절집에 구경 가면 그 김에 부처님께 꾸벅 인사나 올리고, 훌륭한 기독교인의 헌신에 감동할 땐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볼 뿐입니다. 그런 제가 오늘은 어떤 목사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P 목사를 처음 만난 건 1991년 영국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유학생이었고, 그는 그 지역 한인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제게 그는 그냥 동네 형처럼 편안하고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1994년 영국을 떠났고, 그 뒤론 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10년 뒤인 2004년 그에 관한 기사를 우연히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신장병 환자한테 자신의 콩팥을 하나 떼어 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환자는 목사의 가족도 친척도 아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쉰한살이었던 이 목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자칫 생명을 잃을 가능성마저 있는 수술대에 기꺼이 올랐던 것입니다.

10년이 더 흐른 뒤인 2014년 그 목사의 소식을 다시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0일 단식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다음날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단식 나흘째, 그는 제가 기억했던 소탈한 모습 그대로 광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평화로웠던 영국 시절도 떠올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반갑게 나누었습니다. 그가 광화문광장 단식 천막 안에서 환갑을 맞이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과 물로 환갑잔치를 한 셈입니다. 20년 만의 재회를 뒤로하고 광장을 떠나던 중 저는 다른 한 무리의 기독교인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불신 지옥’, ‘종북 척결’, ‘특별법 반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콩팥까지 떼어 주며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또 자신의 목숨까지 걸며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단식에 나선 목사와 그들은 그렇게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단식 10일째와 17일째 다시 P 목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단식을 20일에서 멈춰달라고 부탁해봤습니다. 목숨을 건 단식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진지하게 펴보기도 했고, 콩팥이 하나인 목사의 20일 단식은 콩팥이 둘인 보통사람의 40일 단식에 해당할 거라는 농 섞인 하소연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위 같았습니다. 저는 그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했습니다.

광화문광장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조사는 국가가 잘하면 될 테니, 유족들은 보상만 많이 받으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른바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이 분명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보상보다 진상규명을 먼저 요구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을 그들이 이해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관점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으리라 여깁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유족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려 단식에 나선 시민들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이들의 태도는 용인하기 어렵습니다. 그걸 부추기는 세력은 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상식의 문제를 진영의 문제로 바꿔버린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도 광화문광장엔 콩팥이 하나밖에 없는 P 목사가 바보처럼 또 자기 목숨을 걸고 앉아 있습니다. 9월18일 현재 단식 23일째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출처 한겨레

 
IP : 211.36.xxx.76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진짜
    '14.9.19 2:32 AM (211.194.xxx.187)

    바보 하나가 이 밤, 원글 바로 위에서 천방지축 날뛰고 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 chocopie
    '14.9.19 5:42 AM (72.230.xxx.56)

    광화문에서 십자가 그려놓고 유족들을 욕보이는 이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이렇게 양심이 죽지 않은 분이 있다는 걸 알려주셔서 힘이 나요.

  • 3. ....
    '14.9.19 6:22 AM (108.14.xxx.248)

    그냥, 감사합니다.
    그저 탐욕스러울 뿐인 정치인과 사람들 속에서, 아마도 종교인도 마찬가지라 여깁니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 몇몇이 힘들게 이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 4. 작은움직임
    '14.9.19 7:56 AM (121.50.xxx.19)

    아침부터 눈물 납니다. 광화문 가본적 없는데 목사님 뵈러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 5. 나무이야기
    '14.9.19 8:52 AM (120.19.xxx.215)

    ㅠㅠ
    유족들이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한다면 국가가 근무태만 하는거 아닙니까???
    직무유기이지요...

  • 6. ...
    '14.9.19 10:17 AM (125.119.xxx.26) - 삭제된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목사님도 무사하시길..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423215 씽크대 수전교체비용, 누가 부담하는게 좋을까요? 5 궁금해요 2014/09/30 19,729
423214 지난회에 너무 슬펐어요. 그루가 어른들 다 다독이고 혼자 안고.. 7 마마 안보세.. 2014/09/30 2,170
423213 버릇없는 시조카땜에 스트레스 받아요..ㅠㅠ 6 .. 2014/09/30 4,582
423212 저도 유나의 거리 팬인데 실망한거 4 심야김밥 2014/09/30 2,865
423211 병원의 허위진료기록 ?! 3 어디든 2014/09/30 1,593
423210 좋은 시누이와 올케 이야기 5 동서네 2014/09/30 2,803
423209 사실 호칭보단.. 2 흔남 2014/09/30 978
423208 직구 관세에 관해 아시는 분... 답변 좀 부탁드려요 2 아이허브 2014/09/30 1,317
423207 후임에게 지 자지 빨라던 현역군인은 불구속.. 15 욕나옴 2014/09/30 4,147
423206 볼때마다 살쪘다며 입대는 이웃 아줌마 2 몇명 2014/09/30 2,207
423205 스타벅스 커피숖이 직영이 아니었네요. 몰랐네요. 8 ..... 2014/09/30 5,277
423204 공무원 연금 개편되면 공무원도 인기 떨어질까요? 10 공무원 2014/09/30 3,376
423203 삶은 땅콩 정말 맛 있네요 14 신세계 2014/09/30 4,035
423202 세면대가 박살났어요 ㅠ 이거 교체비용 얼마나 될까요? 6 세면대 2014/09/29 8,929
423201 뇌종양 수술 7 달걀 2014/09/29 3,660
423200 치과 댓글 주신 분 감사합니다 치과 2014/09/29 1,207
423199 세월호 유튜부 1 기막혀 2014/09/29 1,019
423198 서울의 비싸지않은 호텔 추천해주세요 2 휴일 2014/09/29 2,234
423197 도련님이란 표현...너무 이상해요. 44 dma 2014/09/29 4,523
423196 간단한 점심 초대 음식으로 어떤 게 좋을까요? 8 어색 2014/09/29 3,318
423195 정규직으로 뽑아놓고 계약직으로 계약하자는 거 5 2014/09/29 2,410
423194 몸에 석회가 생기는거요 6 사는게 2014/09/29 12,156
423193 일주일에 하루쉬는 날 세탁기야 미.. 2014/09/29 985
423192 50이되도 소녀같은 사람을 보니 40 sf 2014/09/29 22,577
423191 아시안게임승리확정되자마자 나오는 노래제목 알려주세요? 남자목소리.. 4 dma 2014/09/29 1,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