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한국일보 : [36.5도]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내탓이오 조회수 : 1,083
작성일 : 2014-09-08 03:00:01
http://hankookilbo.com/m/v/421a11a078824492965b19042e028346

전략........

약자들의 따스한 연대를 누구나가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같은 대사를 실생활에서도, 허구에서도 수시로 들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많은 문장의 주어로 곳곳에서 발화됐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같은 위대한 인문정신도 저잣거리에서 빈번히 설파됐다. 이제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피식 웃음이 나는, 풍속극에나 등장할 법한 사어(死語)들이지만, 말로라도 그러던 시절이 어쨌든 있기는 했다.

이제는 누구도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의 ‘약자-됨’은 결단코 은폐되어야 할 존재의 치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갑과 을. 나는 내 자식이 갑이 되길 바래.” 정성주 작가가 이태 전 쓴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 나오는 시대를 꿰뚫는 명대사다. 그러므로, ‘갑-되기’가 시대정신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대부분은 약자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윤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한 28사단의 장병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보라며 닭다리를 뜯고 있는 노인들, 한때의 피해자가 가장 극렬한 가해자로 돌변하는 왕따와 학교 폭력, 지역차별과 여성비하를 토사물처럼 쏟아놓는 극우 청년단체…..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나는 너처럼 비명에 자식을 잃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니다’, ‘나는 여성이 아니다’가 이들에겐 일말의 권력, 알량한 권세가 된다. 모두가 갑이 되길 원하고, 기적적으로 모두가 갑이 되는 곳. 아이부터 어른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갑이어서 슬픈 땅.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하다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너무도 성실하게 내면화했다. 약한 것은 딱하고 가여운 것이 아니라 못나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이제 약자조차도 약자의 마인드 따위는 필사적으로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영세 자영업자지만 정치의식은 대기업 CEO인 ‘사장님’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며 노동을 착취하고, 평생을 서울내기로 살아온 중년 부인도 지배계급을 선망하며 거침없는 지역 차별 발언을 쏟아낸다. 권력이라곤 가부장 권력밖에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노인들은 어버이의 이름으로 정신적 매질을 멈추지 않고, 성 권력뿐인 절망한 청년들은 칼날보다 잔인한 언어로 여성을 능멸한다. 내가 약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물을 찾아 물고 물리는, 갑의 표식을 이마에 붙인 을들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이 바로 여기다. 이것은 소수의 흉측한 사람들이 벌이는 이상행태가 아니라 강한 것만을 욕망하게 만든 이 사회의 아비투스가 초래한 총체적 정신병리다. ‘얕보이면 죽는다’는 공포, ‘당하는 게 죄인’이라는 좌절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이 그악스런 비극은 종식될 수 없다.

미시권력의 끊임없는 비교우위를 통해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동안, 강자들의 거악은 쉬이 잊혀졌다. 강자들의 태평성대를 만들어준 건 그러니까 바로 우리 약자들이다. 아마 지그시 웃고들 있었겠지.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추한 것이 추한 것이다. 그게 누구든, 약자를 돕는 자가 아름답고, 약자를 혐오하는 자가 추한 것이다.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사실은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에게라도 가르치는 수밖에.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IP : 180.224.xxx.207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뿅뿅이
    '14.9.8 10:02 AM (223.33.xxx.28)

    좋은 글이네요.

  • 2. ..
    '14.9.8 10:57 AM (116.39.xxx.34)

    다른 싸이트에서 올려진 것 보고 읽었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 3. ㅇㅇ
    '14.9.8 11:07 AM (61.254.xxx.206)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글이네요.
    내 자식은 약자를 보듬을 줄 아는 인간이 되도록 가르쳐야겠어요

  • 4. ..
    '14.9.8 12:41 PM (223.62.xxx.64) - 삭제된댓글

    저장...

  • 5. 저도..
    '14.9.9 1:23 AM (118.223.xxx.153)

    잘 읽었어요.

  • 6. 서글픈 현실
    '14.9.9 10:39 AM (223.62.xxx.87)

    누구나 악을 행하지않고는 살수없고
    시민들이 어쩔수 없이 사기꾼이 되는 나라가
    세상에 있다면,
    목을 매달아야 할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악인이 되지 않을수 없게
    강제하는 자다. - 루소

    만약에 있다면 하던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가 안쓰러울뿐입니다.

  • 7. 비갠 풍경
    '18.2.18 8:21 PM (58.235.xxx.6)

    명문이네요. 4년 전 글인데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나? 자문하게 되네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423879 아이들 보험 문의드려요..자전거 타다 남의 차 상해입힐 경우등... 8 ^^ 2014/10/07 873
423878 김정은도 죽으면 박제될까요? 8 서리풀 2014/10/07 1,333
423877 체험학습으로 놀이공원 가는데 츄리닝바지 입고 가면 안될까요? 1 중학생남자애.. 2014/10/07 485
423876 요즘 세일하는 로드화장품 샵 없죠? ... 2014/10/07 260
423875 아홉시 등교 학생들 수면시간 어떤가요? 12 .. 2014/10/07 1,760
423874 미친 유럽 예뻐질지도 3 재밌네요 2014/10/07 1,963
423873 경기가 안 좋으니 맘이 불안하네요.. 2 00 2014/10/07 1,262
423872 팩트티비 국정감사 생방송 입니다. 16 팩트 2014/10/07 697
423871 혼자가 행복해야 둘이어도 행복하다. 9 fff 2014/10/07 1,700
423870 저기요 그전에 요리글 자주 올리시던 콜린님 블로그 주소 아시는분.. 8 콜린님 팬 2014/10/07 3,749
423869 찰현미도 현미인거죠?? 7 .. 2014/10/07 13,542
423868 전기계량기 검침 부분이 이상한데 좀 봐주시겠어요? 3 궁금 2014/10/07 1,017
423867 속옷사이즈 3 ㅜㅁ 2014/10/07 648
423866 장롱에 있던 옷이 탁났는데요... 3 참나 2014/10/07 1,351
423865 하루에 30분씩 꾸준히 운동해도 체력이 좋아질까요? 3 저질체력 2014/10/07 2,376
423864 도와주세여 15 회사운동회 2014/10/07 2,000
423863 형제간의 증여 면제한도는 얼마까지인가요? 1 증여 2014/10/07 13,080
423862 태몽이요 ㅎㅎ 3 ... 2014/10/07 690
423861 참교육학부모회는 어떤곳인가요? 학부모 2014/10/07 247
423860 볕에 말린 느타리버서물색이 이상한데요... .. 2014/10/07 374
423859 귀여워요.. 주인도 다람쥐도 5 에고 2014/10/07 1,402
423858 30대 후반 체중관리방법 공유해요 33 빡세 2014/10/07 6,383
423857 왼쪽에 차승원글들로 도배네요.. 부인은 왜이리 욕먹나요? 25 이러나저러나.. 2014/10/07 6,519
423856 헤어에센스 추천좀 해주세요. 실크테라피만 사용해봤어요. 8 soss 2014/10/07 5,021
423855 보일러 교체 때문에 더운물을 덥혀서 써야 하는데... 3 고달프다 2014/10/07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