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이게 무슨 성탄이냐고 이게, 미술관 나들이에 코트를 사러갔다가

조회수 : 2,191
작성일 : 2013-12-12 19:42:47
한 학기동안 용을 쓰던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고 
날씨도 꾸리했지만 시원한 마음으로  
간만에 룰루랄라 시내에 나갔습니다. 
점 찍어 둔 덕수궁 미술관의 한국근현대회화 100선도 보고, 
시립미술관의 북유럽 디자인전도 보고,
남도식당의 추어탕도 먹고,
맛난 커피도 마시야지. 

그리고 82쿡에서 이 디자인, 저 디자인, 이 핏, 저 핏, 교습받았던 것처럼 
5년이상 입을 코트나 한 벌 사와야겠다 맘 먹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과 분단과 개방, 개발로 숨차게 살아온 우리의 집단적인 자화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본 그림들은 나이가 들어 읽는 요사이 고전처럼 그냥 마음으로 읽힙니다. 
이중섭의 '가족' 앞에선 눈물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6000원에 직접 보면서, 이게 무슨 호사인가 
아 좋다, 
참 좋다를 반복하며 즐겼답니다. 

시립미술관도 가고, 
남도식당 추어탕으로 몸을 뎁혀 정동길을 돌아 나오니, 
흰 눈이 펑펑 

함박눈이 내리는 시청앞에
크리스마스 트리는 치장을 마쳤고, 
스케이트장 개장 준비로 분위기는 이미 성탄이었습니다.

밀양 송전탑을 반대하며 돌아가신 분의 분향소가 있기에,
잠시 묵념을 하며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두두두두두두 달려오는 소리
경찰이 몰아와 분향소 천막을 내리려는 트럭을 막아서고,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마침내,
방금 제가 기도했던 그분의 분향소를 들어내고  
제 눈 앞에서 질질질질 
국화가 갈기갈기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고 
"협조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검거해" 확성기 소리에,

내가 아직 2013년에 사는 것이 맞는지 어두운 하늘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몇 달전 분당지역에 보호관찰소를 반대하던 학부모들을 대하던 경찰과 미디어의 태도는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대하듯 야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몇 명의 노인들과 시민들이 조용히 꾸리고 있는 분향소를 일방적으로 내팽겨치는 경찰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나고 두려웠지만, 일반 시민인 제가 그냥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 심한 폭력을 함부로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눈이 될까 하여 
눈이 오는 시청앞 광장에 한참을 서서 다 보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으면서요. 

저 말고도 지나가던 시민들 몇몇이 멀찌기 떨어져서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담고 있었는데, 
백주대낮의 보고 있는 눈이 많다는 건 공권력에 감시의 눈이 되는 듯 했습니다. 사람에게 폭력을 쓰진 않더라구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 다쳐요"라는 말도 간간이 들렸는데, 이 또한 작은 방패가 되는 듯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가와 집으로 향하는데, 
고개를 돌려 돌아서는데,
그만 바닥에 나뒹구는 국화와 함께 성대한 성탄 트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는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왔냐고
예수를 따르는 신자가 이렇게 많은데,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위해 세상에 온 그를 이런 식으로 기리고 있다니,  


이게 무슨 성탄이냐고,
이게 무슨 성탄이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코트를 사려던 백화점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돈은 코트 말고 다른 데 쓰려합니다.  
IP : 219.240.xxx.112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ㅜㅠ
    '13.12.12 7:46 PM (180.224.xxx.207)

    북유럽 디자인전 보셨다기에 어떠냐고 좋았냐고 물으려다가
    글을 끝까지 읽으면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예수가 무엇때문에 이땅에 와서 죽음을 당했고
    그분을 따른다고 하는 교회며 신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게 무슨 크리스마스냐고요...ㅜㅠ
    곁에서 끝까지 지켜봐주신 원글님과 시민들께 감사드려요.
    무심히 지나쳐 갔다면 사람도 때리고 다쳤을지 몰라요.

  • 2. ㅇㅇ
    '13.12.12 7:49 PM (112.214.xxx.247)

    가슴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어떻게 해야하는지.

  • 3. 참맛
    '13.12.12 8:04 PM (121.182.xxx.150)

    이 땅에 제대로 된 언론인들이 없는 탓이지요 에휴.....

  • 4. 그린 티
    '13.12.12 8:18 PM (222.108.xxx.45)

    저도 눈 내리는 날 미술관도 다녀오시고 부럽 이리 말하려고 했다가...오늘은 이래 저래 코가 시큰거립니다.

  • 5. 에구...
    '13.12.12 9:26 PM (222.98.xxx.133)

    가슴이 저며오는...눈이 와도 전처럼 기쁘지 않으니...

    아이 웃음소리에 문득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저 어린것이 살 세상을 어찌 지켜내야 할지...

    밖에서 지켜내고 계신 분들껜 추운 밤이 될거 같아 맘이 더 아프네요...

    정부란...그럴일 없게 만들어 주라고 십시일반 세금내서 유지하고 있는건데

    그걸 권리인줄 알고 권력으로 만들어 지들 맘대로 휘둘러대니...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334551 그는 국민과 약속을 지켰습니다. 해남사는 농.. 2013/12/25 1,407
334550 게으르고 청개구리 남편 요리하는팁 주세요 3 로라 2013/12/25 1,595
334549 32살. 위내시경 해봐야할까요? 보통 몇살쯤부터 받으시나요? 4 질문하나만... 2013/12/25 2,236
334548 집에 걸어놓을 동양화 어디서사세요? 1 m 2013/12/25 1,045
334547 부산역근처 장례식장 어디가 좋을까요? 6 외며느리 2013/12/25 1,694
334546 과고는 모든수업 영어로 진행... 5 고딩엄마~~.. 2013/12/25 2,865
334545 성공회 신부들, 조계사 방문 “힘내라, 적극 도울것”…‘인증샷’.. 9 철도노조 면.. 2013/12/25 1,959
334544 용의자 보고 왔어요.(스포 없어요) 6 ㅠㅠ 2013/12/25 1,718
334543 필라신발박스없음 환불 안되는거에요? 5 땅지맘 2013/12/25 1,200
334542 유인나 얼굴에 뭐했나요 25 .. 2013/12/25 21,761
334541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2 변호인 2013/12/25 1,067
334540 '철도노조 은신' 조계사에 사복경찰 잠입했다가 들통나 쫓겨나 4 어쩌나 2013/12/25 1,313
334539 유치원생 장거리비행 안되겠죠? 7 쭈앤찌 2013/12/25 1,004
334538 프린스턴 가나 2013/12/25 998
334537 혹시 서울에 말린 시래기 파는 곳 있나요? 3 이작 2013/12/25 1,729
334536 성공회 신부들, 조계사서 철도노조 지도부 면담 긴급기자회견.. 2013/12/25 1,210
334535 박태만 수석부위원장 “정부와 대화 후 자수하겠다 5 주지스님 기.. 2013/12/25 1,377
334534 너무 자주 울어요. 문제가 있는건지... 7 마흔둘 2013/12/25 1,910
334533 귀에서 피가 두스푼 정도 나왔다는데 어떡해야 하나요? 7 ㅠ.ㅠ 2013/12/25 2,702
334532 레이저치료 회의적이네요. 12 지긋지긋 2013/12/25 5,859
334531 조계사, 철도노조 지도부 안전하게 보호하겠다 3 ㅇㅇ 2013/12/25 1,573
334530 상속남 드라마가 시크릿가든만큼 8 그런데 2013/12/25 1,947
334529 프란체스코 교황님... 4 vina 2013/12/25 1,471
334528 미코 김연주하고 손태영하고 많이 닮은듯 1 ... 2013/12/25 2,339
334527 변호인 그양반 일대기, 송강호씨가 청와대에서 그를 만난적이 있군.. 2 우리는 2013/12/25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