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의 블로그에 실린 글,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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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겨울, 12월 15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박탈했던 대통령직접선거권이 15년 만에 행사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오늘, 그날 밤 제가 겪었던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자 3김과 노태우가 맞붙었습니다. 진보진영에서는 백기완선생님이 출마하셨죠. 백기완선생님은 학생운동권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지만 결국 김영삼, 김대중씨의 단일화를 위해 노력하다 중도 사퇴했습니다. 두 김씨의 단일화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수많은 학생운동권 구성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시 저는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보가 실소유자인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까지 그쪽 출신이라 대구 경북의 정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경북의 시골지역에서는 부정선거가 거의 공공연히 이뤄질 가능성이 아주 높았습니다. 민주당 계열은 씨가 마른 동네가 허다하니까, 선거관리를 하는 공무원이나 (당시)민정당원이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니편 내편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동료들은 공정선거감시인단을 꾸리고 선거참관인 자격으로 경북의 오지마을 투표소들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투표소 참관인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라도 모두가 정당당원이 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저는 제가 지지하지도 않는 평민당(김대중후보) 당원이 되었습니다.
당원등록을 마치고 참관인신청을 했더니, 저는 경북의 예천이라는 곳으로 배정을 받았습니다. 15일 낮에 대구에서 출발했지만 당시는 워낙 교통이 안 좋아서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예천의 카톨릭농민회 사무실에 도착을 했습니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에서 우리 동료들은 흡사 자대배치 받는 신병들처럼 다음 행선지를 배정받을 때까지 어벙벙하게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농민회가 조직한 대로 호명하면 우리는 배치된 면의 동이나 리로 알아서 각자 찾아가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배는 고프고 길은 낯설고… 비장함은 어디가고 서글픔만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면 단위의 어느 시골마을에 배치 받았는데 다행히도 그 마을 담당자 분께서 읍내에 볼일이 있어 나오셨다가 저를 데리러 직접 오셨습니다. 저는 그 분이 모는 오토바이에 앉아 칼바람을 맞으며, 실려가는 소처럼 하염없이 겨울 밤을 날아 갔습니다.
그저께 저녁, 박근혜 승리가 확정되면서 저는 내 안의 스위치를 절반이상 내려 놓기 시작했습니다. 느낌을 살려 두면 제가 못살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부터 저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즐겁게 잘 지냈습니다. 다만 현실을 자각시키는 자극은 모두 차단했습니다. 티비도 켜지 않았고 신문도 보지 않았고, 택시에 DMB가 켜져 있으면 꺼달라고 했습니다. 거리를 다닐 때는 행여 박근혜나 문재인, 안철수라는 이름이 들려 올까 봐 이어폰을 끼고 김민기나, 스크리아빈, 정차식, 헤르만 프라이를 조금 크게 들었습니다. 조금 전, 몇 시간 전까지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현실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티비에 명랑한 예능프로그램은 멈추지 않고, EBS를 틀면 꽤 교양있는 프로가 연이어 나옵니다. 어제 오후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고요히, 아주 고요히 책을 읽고 필요한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세상은 물속처럼 조용했고, 나를 격리시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녁에는 아이들과 심지어 고스톱도 한판치고, 아끼는 후배와 소주도 한잔하고, 유쾌하게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득 25년 전 그날 밤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은 차단할 수 있었지만 내 안의 기억은 금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제가 울었던 것은, 그날 밤이 서러워서도 아니고 오늘 밤이 괴로워서도 아니고, 앞으로의 5년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저를 데리러 오셨던 그 농부아저씨는 당시 5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분은 김대중씨의 지지자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고향 밖을 한 번도 나가 본적이 없는, 농사를 유일한 직업으로 알고 사시는 분이 ‘전라도 빨갱이’를 지지하다니, 놀라 자빠질 일이였습니다. 1971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후보의 연설을 듣고 나서 그 분을 존경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의 모멸과 냉대를 받으면서도,저를 만났던 그날까지 28년 간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답니다.
젊은이가 좋은 일 한다고, 다들 취직준비 하느라 바쁠텐데 이렇게 촌 구석까지 와서 정의로운 일 한다고, 귀한 고기 반찬에 술까지 대접해 주셨습니다.말이 많으신 분도 아니고 식견이 뛰어나신 분도 아니였습니다. 그 분의 지조와 절개가 오늘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제가 편히 자야 한다며 안방을 내 주셨습니다.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그날 밤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군사독재를 끝내는 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새벽에 마당에 나섰더니, 달빛이 왜 그리도 밝던지요. 문득 내려다 본 그 분의 집 앞에는, 아뿔사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달빛에 비치는 그 밤의 금모래를 보셨더라면 여러분들도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내 젊음이 서러웠고, 이 나라가 사무쳤고, 정의가 그리웠습니다. 그보다, 달빛을 환대하는 금모래 낙동강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오늘밤 저는 그 아저씨와, 그날 밤의 낙동강 금모래가 너무 슬픕니다. 그 강은 파헤쳐 졌을 것이고, 아마도 그 아저씨는 돌아가셨겠죠.
저는 그 아저씨에게 부끄러워서 오늘 어린애처럼 징징 울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그날 이후에도 10년이 더 지나서야 ‘김대중대통령’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나약한 지식인 나부랭이는 세월을 믿을 줄 모릅니다. 그 ‘무지랭이 농사꾼’은 자신의 신념을 무려 38년 동안이나 지켰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아저씨를 뵌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저씨는 물론이고 학교에 근무한다던 아리따운 따님과 정겨운 아주머니가 종종 생각이 났습니다.그래도 세월이 계속 흐르자 이 날의 기억도 회상의 빈도가 대통령 선거와 숫자를 비슷하게 하다가 외국살이를 오래하면서는 그 나마도 잊혀졌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무심코 흥얼거린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라는 콧노래 끝자락에 실려 아저씨가 찾아오고 금모래 낙동강이 가슴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닫아 뒀던 스위치가 자동으로 열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 왔습니다. 낙동강 만큼이나 굳건히 흐르던 그 아저씨의 마음이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아저씨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었더니 아저씨가 웃어 주셨습니다. 세월을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제대로 살아야 겠습니다.
이호철선생님의 책에 실린 글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더러운 물과 깨끗한 물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아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에이, 그거야 더러운 물이죠”라고 대답합니다.
선생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깨끗한 물이 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 아이가 대답합니다.
“계속 흐르면 되요!”
흐르는 물은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답니다. 모래와 자갈과 낙엽과 바위가 장애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듬고 부딪히고 춤추고 감싸며 그렇게 흐릅니다.
우리도 그렇게 흐를 수 있습니다. 영혼의 힘이 있으니까요. 흐르는 것은 운명이기도 합니다. 보수가 ‘이대로’를 원한다면 진보는 ‘앞으로’가야 합니다.수구가 정체를 원한다면, 정의는 흘러야 합니다.
역겨운 하늘,
망령든 미래,
그래도
다시, 다시 한 번 더,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 목적이 되게 하소서.
전달사항.
1. 공공상담소, 좀 쉬었다가 다시 합니다. 몇 달 휴가를 주십시오.
2. 저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투표 잘하자고 조금 협박한 겁니다. 제가 한국을 놔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내년부터 더 괜찮은 일들 더 많이 할 겁니다.
3. 장준하선생님 의문사 규명하는 과정 똑똑히 잘 지켜 봅시다.
4. 김근태 선생님의 은혜 잊지 맙시다.
5. 투표율 70% 넘으면 뭐뭐 하겠다는 사람들 한자리에 다 모여서 축제처럼 즐기고 놀면 좋겠습니다. 코 길게 빠트리고 있는게 더 꼴같잖아 보입니다. 즐기면서 잘 놀고, 유쾌하게 사는 방법, 다같이 나누면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찾아 봅시다. 누가 문재인후보 트위터 같은 곳에 제안해 주면 좋겠습니다. 투표율 공약한 사람들 다 모여서 투표율 높인 것, 민주주의의 중요한 권리 행사를 성공적으로 실현해 낸 것, 우리 공이 크니 축제 한 번하자고 말입니다.
6. 5년을 유예했다고 해도 좋고, 패배했다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다 좋은데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대통령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웃인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사람이 먼저인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7.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후보는 김소연 후보입니다. “우리의 정치” 조금씩 진일보합시다. 김소연후보님, 정말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