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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아끼는 시 한 자락 꺼내 보아요.

오이풀 조회수 : 2,702
작성일 : 2012-10-05 09:19:40

오늘은 아니지만

요 며칠 가을날이 너무 좋네요.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고...

 

가슴이 싸아해지는 시라도 읽고 싶은데

님들이 감동받은 시 한편씩 들려주세요.

 

저는   페르시아의 루미라는 시인의 '봄의 과수원으로 오라'이라는 시를 외우고 다녔었는데

막상 적으려니 생각이 안나 인터넷을 뒤지니 제가 알고 있던 시와 조금 다르네요.

엉성한 기억으로 써봅니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라

                                                                                 루미

 

봄의 과수원으로 오라.

 

이 곳에는 햇볕이 있고 

포도주가 있고

석류꽃 그늘아래 달콤한 연인이 있다.

 

그대 만일 온다면

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 만일 오지 않는다면

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니다.

 

 

 

IP : 175.211.xxx.90
4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2.10.5 9:22 AM (123.109.xxx.131)

    오....82에서
    루미의 시를 만나다니!!

    아침부터 루미의 사랑이 꽉 차는듯합니다

  • 2. 날아라얍
    '12.10.5 9:25 AM (112.170.xxx.65)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중략)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숸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국개론에 공감하며 절망할 때 위로해준 시입니다...

  • 3. 행인_1999
    '12.10.5 9:28 AM (116.120.xxx.163)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때문에 모든 것이 변했다고

  • 4. 언제나23살
    '12.10.5 9:29 AM (210.206.xxx.168)

    아침에 시도 읽고 좋네요 님들덕에 행복해요 ^^

  • 5. 저도 감사해요..
    '12.10.5 9:34 AM (221.147.xxx.243)

    감동이에요~

  • 6. 22
    '12.10.5 9:36 AM (111.118.xxx.203)

    전 오마르 워싱턴의 나는 배웠다의 구절을 신랑한테 종종 얘기해요. 20대때는 황동규님의 즐거운편지로 어딘가 있을 그님을 계속 그렸네요

  • 7. 오이풀
    '12.10.5 9:39 AM (175.211.xxx.90)

    한 편 더요.
    테오도르 레츠키라는 미국시인의 시입니다.

    아버지의 왈츠

    당신 숨결의 위스키 냄새는
    조그만 소년을 어지럽히죠.
    그러나 나는 죽음처럼 매달려 있었어요.
    그런 왈츠는 쉽지 않았죠.

    우리는 남비들이 부엌 선반에서
    미끄러질 때까지 뛰어 놀았어요.
    어머니의 얼굴이
    펴질 수 없었죠.

    내 허리를 잡은 손의
    손가락 관절 하나는 못쓰게 망가져 있었어요.
    당신이 스텝을 잘못 밟을 때 마다
    내 오른쪽 귀가 혁대쇠에 스쳤어요.

    당신은 때에 찌들은 손바닥으로
    내 머리에 박자를 쳤어요.
    그리곤 여전히 당신 셔츠에 매달린
    나를 침대로 왈츠를 치며 데려다 주었죠.

  • 8. 오이풀
    '12.10.5 9:40 AM (175.211.xxx.90)

    제목 얘기 해 주시면 찾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가능하시면 여기다 직접 쓰시면서 다시 한번 감동을 같이 나누어 보죠^^*

  • 9. 나루미루
    '12.10.5 9:52 AM (218.144.xxx.243)

    베를렌느 입니다. 뒤에 있는 몇 줄은 못 외웠어요.
    집에 도착해 우리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시라고 하면 덜 낭만적이겠죠...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 있소.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소.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다만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 주오.
    새벽 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온 몸에 얼어붙은 이슬방울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대 발치에 지친 몸 누이고
    소중한 휴식에 순간에 잠기도록 허락해주오.
    그대의 여린 가슴 위 뒹굴리도록 해 주오.
    지난 번 입맞춤에 아직도 얼얼한 내 얼굴을...

  • 10. 나를 위로하며 /함민복
    '12.10.5 9:53 AM (121.190.xxx.242)

    삐뿔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 11. .....
    '12.10.5 9:54 AM (124.216.xxx.41)

    님의 말씀 절반은 맑으신 웃음
    그웃음의 절반은 하느님거 같으셨네
    님을 모르고 내가 살았다면 아무 하늘도 안보였으리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나오는 귀절을 보고 아직까지 외우고 있네요

  • 12. 시원한
    '12.10.5 10:07 AM (1.209.xxx.239)

    얼마전에 EBS에서 하는 고전읽기 프로그램에서 오딧세이아를 해주었죠.
    서두에 오딧세이를 노래한 이 시를 읽어주는데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인생이, 우리의 삶이 그 여정 자체로 의미가 있음을...
    * 이타카는 그리스의 도시로, 오딧세이의 고향입니다.



    이타카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그리스 시인)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콘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 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 13. ^^
    '12.10.5 10:07 AM (116.126.xxx.64)

    시하고 친하지 않은 편인데,
    우울한 아침 시가 제 마음을 만져주네요.

  • 14. 언젠가
    '12.10.5 10:08 AM (112.152.xxx.143)

    신문에서 읽었던 심보선의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 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 15. 나이들어가니 공감
    '12.10.5 10:08 AM (210.106.xxx.2)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16. 「새와나무」 류시화
    '12.10.5 10:12 AM (59.187.xxx.251)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 17. 절절
    '12.10.5 10:23 AM (59.3.xxx.181)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행복한 아침 입니다.

  • 18.
    '12.10.5 10:37 AM (114.203.xxx.125)

    시가 이리 좋은거였군요. 시랑 안친한데..,.,감동적인 오전입니다

  • 19. @@
    '12.10.5 10:38 AM (118.223.xxx.61)

    저 가을 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 20. 징검돌을 놓으며-문태준
    '12.10.5 10:55 AM (211.115.xxx.132)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 21. 거룩한 식사-황지우
    '12.10.5 11:05 AM (211.115.xxx.132)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22. csi 출동 부탁드려요
    '12.10.5 11:20 AM (125.132.xxx.232)

    예전에 이런 류의 글에 댓글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신문에서 시 소개하는 코너였는지 모르겠지만
    바다인지 강인지 .... 아마도 바닷가인듯해요.
    묶여있는 배를 보며 쓴 시였는데
    묶여서 모진 풍파를 담담하게 견디는
    힘든 인생을 겪어나가는 데 힘이 되는 시였어요.
    읽으며 눈물이 났었는데 저장해둔다고 했던 거 같은데 폴더 뒤져봐도 안 나오네요.

  • 23. ...
    '12.10.5 11:20 AM (119.199.xxx.32)

    북방추색
    청마 유치환
    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짖하는 고량 밭 십이량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려는 하늘!


    석양이 두렁길을 호올로 가량이면
    애꿋이도 눈 부시니 제 옷자락에


    설흔 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

    (만성 ) 41호 1949작

  • 24. ··
    '12.10.5 11:25 AM (58.125.xxx.233)

    희망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25. 오이풀
    '12.10.5 11:45 AM (175.211.xxx.90)

    우와~
    생각치 못한 좋은 시들의 물결이~~~
    가볍게 생각하고 올렸었는데

    흑흑흑...

    감동입니다...

  • 26. 살구둑
    '12.10.5 11:51 AM (175.206.xxx.81)

    도망
    장정일

    도망가서 살고 싶다
    정일이는 정어리가 되고
    은희 이모는 은어가 되어
    깊은 바닷속에 살고 싶다

  • 27. 인우
    '12.10.5 11:54 AM (112.169.xxx.152)

    그대가 오면 이 모든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안오면 이 모든것이 아무것이 아니다...... 에 마음을 내려놓아요.

  • 28. 빈 틈 -정호승
    '12.10.5 12:18 PM (180.182.xxx.161)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 29. 쓸개코
    '12.10.5 12:21 PM (122.36.xxx.111)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30. 잠새
    '12.10.5 12:57 PM (14.53.xxx.85) - 삭제된댓글

    고마운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31. 잠새
    '12.10.5 12:59 PM (14.53.xxx.85) - 삭제된댓글

    대신 매를 맞고
    -복효근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마음이 한 움큼 뜯겨나가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어젯밤 술에 취해 방배동에서 모 시인과 다퉜는데
    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평소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딸아이 피부약을 내 감기약인 줄 알고 먹고서
    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 32. 이면우
    '12.10.5 1:40 PM (175.209.xxx.95)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꾸준히 정어리 통조림을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는 저녁 식탁의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그렇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나는 엄숙히 선언한다
    통조림을 믿지 말라, 그 속엔 아직 정체가 안 밝혀진
    맹독이 숨어 있어 언제 뛰쳐나와 우리를 꺼꾸러뜨릴지 몰라
    그래 마늘과 고춧가루를 뿌려 펄펄 끓여 먹는거다 일순
    섬광이 번쩍 지나가고 짧은 탄식처럼 따듯한 저녁 식사는 끝났다
    모두 평온하고 통조림처럼 무사한 저녁이 슈퍼에 많다
    삶에 지치지 않은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中

  • 33. 둥둥
    '12.10.5 1:49 PM (211.253.xxx.34)

    역쉬 82는 지난 글 읽는 재미가 있어요.
    페이지번호 8까지 왔는데 이 글을 읽게되네요.

    루미의 시로군요.
    저도 제가 알던 문장과 조금 다르지만(번역 차이겠죠)
    이 시의 느낌만은 그대로네요.


    원글님이 추천해주시는 시도
    또 댓글님의

    저 가을 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 라는 시도 간단하지만 참.. 따뜻한 시네요.

    원글님 고마워요.
    글읽고 싶은, 책 읽고 시픈 가을을 만들어주시네요.

  • 34. 폴리샤스
    '12.10.5 1:55 PM (119.71.xxx.115)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 이생진의 그리운바다 성산포, 함민복의 '모기가 내눈의 피를 빨아도..그래도 당신 '이라는 싯구가 있던 시였는데 제목이 생각안나네요. 좋아하던 시들을 노트에 꼭꼭눌러 적어놓고 보았는데... 나이가 드니 무지하게 좋아하던 시들이 가물가물 제목조차 기억안나요ㅠㅠㅠ

  • 35. 어디 우산 놓고 오듯
    '12.10.5 4:41 PM (211.246.xxx.238)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36. 바람이분다
    '12.10.5 5:21 PM (125.129.xxx.218)

    나의 새 - 유승도


    내가 인간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승도야


    - 유승도,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창비)

  • 37. 바람이분다
    '12.10.5 5:23 PM (125.129.xxx.218)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때
    가마니 한 장 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38. 바람이분다
    '12.10.5 5:26 PM (125.129.xxx.218)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 장석주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몸에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창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바지는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 나가 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내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 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뒤흔든다

  • 39.
    '12.10.5 7:20 PM (125.131.xxx.63)

    좋은 시들이 너무많군요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 40. 우행시
    '12.10.5 7:55 PM (1.249.xxx.41)

    너무 좋군요...

  • 41. Zzzxx
    '12.10.5 10:51 PM (116.125.xxx.154)

    정말 좋은시들 ㅜㅜ

  • 42. 티스푼
    '12.10.5 11:47 PM (210.2.xxx.135)

    글써주신 모든분 감사합니다
    잠이 안오던 찬마음이 덕분에 따뜻해집니다

  • 43. 긍정적인 밥/함민복
    '12.10.6 12:37 AM (175.117.xxx.13)

    시 한 편에 삼 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 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44. 엄마걱정/기형도
    '12.10.6 12:39 AM (175.117.xxx.13)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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