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특정 지역 이름을 써서 분란을 조장하는 것처럼 느껴지실까봐 걱정되네요.
저는 서울 태생이고 계속 서울에서 살다 결혼했어요.
남편이 저 만날 때 즈음, 잠깐 서울에 와 지낼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불꽃같은 연애를...ㅋㅋ
연애 시작하고 얼마 안돼 남친(현 남편)은 고향으로 내려가고 장거리 연애 8년.
그 8년 중 후반기 3년 정도는 다시 서울로 파견왔고 (부끄럽지만 제가 가장 큰 이유!!! 라고 믿고 있음ㅎㅎ)
결혼 후 (돈이 없어 ^^;) 서울엔 입성 못하고 현재는 경기 남부에서 살고 있어요.
저는 자라면서 '전라도가 어쩌고...'하는 말을 직접 들은 기억은 별로 없어요.
다만 연세에 비해 꽤 진보적?인 친정 아버지가 우리 현대사에서 전라도 분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는 말씀을 하신 걸
언뜻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 입학해서 여러 지방의 친구들 만났고, 개인 차도 있어서 그런지
지역에 대한 어떤 특징 같은 걸 느끼지는 못했어요.
남편을 만나고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전라도 시댁을 덤으로 얻으면서 ^^;
일가친척 모두가 서울, 혹은 경기도 언저리였던 제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문화를 가진 시댁을 만나게 됐죠.
신기한 일도 많았고, 재밌는 일도 많았어요.
어머님, 아버님과 통화할 때는 잘 못 알아듣고 그냥 맥락으로 짐작하며 네,네 대답한 적도 많고요.
게시판에서 전라도가 어쩌고 저쩌고 할 때마다 뭔가 하고픈 말은 있는데
오늘 마침 또 그런 얘기가 있길래,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분석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습니다.
지역색이라는 거, 저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봐요.
나라마다 문화의 차이가 있듯이 비슷한 지역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갖고 있는 경향성?
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는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이 지역색이 사라지는 게 안타깝게 생각되는 쪽이에요.
다양성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그 경향성이라는 것이 각각 개개인의 무엇을 설명하거나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이에요.
어떤 지역이 어떠한 문화적 경향성을 지닌다고 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다고 보는 건 위험하죠.
그러니 이 경향성을 가지고 개인에게 적용해서 일반화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책을 많이 읽으면 사고가 풍부해진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식화된 경향성이지만
책 많이 읽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고가 풍부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지역색은 그냥 지역 공통의 문화적 경향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개념에 불과하지
그 지역 사람 개개인에게 함부로 대입하고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럼 제가 겪은 아주 개인적이고 비분석적인 시댁쪽 (전남 어느 지방) 분위기와 경향성을 말해볼게요.
이 분들이요, 제가 보기엔 꽤 정서적으로 풍부해요.
풍부하단 얘긴 정서적인 면에서 민감하다, 예민하다, 감각이 뛰어나다, 재주가 있다... 이 모든 걸 포함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좋은 면일 수도, 나쁜 면일 수도 있죠.
말에 위트가 있고 재치가 있는 반면, 스리슬쩍 뼈 있는 말씀도 잘 하십니다.
남도에서 발달한 소리(판소리, 민요 등의 가사)를 봐도 그런 게 느껴지잖아요.
웃기면서도 뼈 있는 소리.
언어 생활 전반에 그런 게 풍부해서, 그런 면에서 둔하거나 경험치가 떨어지는사람에게는
'웃으면서 뒤통수 치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정도 참 많으시죠.
시댁에 내려가면 동네가 정말 친척같이, 아직 그런 문화가 남아있어요.
제 아이들을 어린 시절만이라도 그런 '살아있는 마을'에서 키우고 싶은 생각 많이 했네요.
하지만 그만큼 말도 많고, 사생활 보호 그런 면에서는 감각이 떨어져요.
단순히 동네 분들이 나이가 많으셔서는 아닌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서울과 그 주변 수도권에 비해서는 확실히 마을 공동체가 아직 건재합니다.
그래서 따뜻하기도 하지만, 개인적 생활과 공간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흥도 많고, 문화적인 재주?도 많아보였어요.
점잖은 분도 마을 잔치에서 거침없이 장구 매시더라구요. 흥이 들면 돌변(좋은 의미로 ㅎㅎ)하는 느낌?
제 남편도, 시동생들도, 시외가, 시댁 동네... 모두 공통적으로 흥이 많고 잔치를 즐길 줄 아는, 한마디로 놀 줄 아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친근함이 금방 들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느낀 전라도 문화의 또 한 가지 경향성은 '자존심'이었어요.
전반적으로 자존심이 세어 보였어요.
남에게 기대거나, 빌어먹거나 하는 것에 대해 다른 곳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행여나 그런 취급을 받으면 상상 이상으로 흥분하고 화를 내는 걸 몇 번 봤네요.
또한,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서도 민감도가 남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물론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좋아하진 않겠지만
이쪽 분들은 그것에 대한 민감도가 훨씬 높아서 반응도 훨씬 강하다고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싶으면, 아주 싸늘하고 냉정하며
때로는 분이 차서 꼭 응징?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보통은 연을 끊는 것을 큰 응징으로 여기시는 듯...
이 때 가까운 사람에게, 친한 사람에게 상처난 자존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위에서 말한 '위트있게 뼈 있는 말하기' 같은 방법으로 표출되기도 하고요.
남편하고 부부싸움하면 이런 부분에서 서로 코드가 안 맞아 처음엔 좀 힘들엇네요.
남편은 제게 절대 얼굴을 붉히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요.
장난도 잘 치고, 농담도 잘 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엔 저를 즐겁게 해주죠.
그런데 둘 사이에 뭔가 의견 차이가 있거나 감정이 틀어졌을 때,
저는 정색을 하고 오목조목 따지면서 옳고 그름을 가르려고 하는데
남편은 다 듣고 끄떡끄덕 하다가 농담 한 마디 툭 하고 던지면서 저를 웃기고 논쟁을 종결시켜요.
그런데 그 툭 던지는 말이 실은 뼈가 있는 말인 경우죠.
제가 감정의 파도가 안정화되고 남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스리슬쩍 부아가 나기도 하고, 반대로 제가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그래요.
부아가 나는 건 (결혼 초기엔 이걸로 속 많이 끓였음)
나는 싸우자는 게 아니라 논쟁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내 생각에) 건강한 방법을 시도하는데
남편은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는 걸로 느껴졌고,
또 웃기는 말로 좋게 언쟁이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게 실은 내게 던진 뼈 있는 말이었다는 것도 당황스럽더라구요.
하지만 요즘엔 부끄러움을 더 많이 느껴요.
제 딴엔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런 상황에서 저는 굉장히 감정적이더라구요.
그래서 말은 따박따박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지만 꽤 흥분하고 자기중심적이죠.
반면 남편은 한 발 물러서서 제가 넘고 있는 감정의 파고를 지켜보고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맞부딪쳐 불필요한 싸움(싸움이 싸움을 낳는 나쁜 경우)를 방지하고
막판에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되, 지리한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
위트있는 한 마디로 분위기를 바꾸면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 여유와 재치는 제가 꼭 배우고 싶은 부분이에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오히려 남편이 더 애교쟁이처럼 보이고
저는 종종 싸움닭처럼 보인답니다. ^^;
남편은 남자치고 눈치도 빠르고, 감각도 뛰어난 편인데 저는 이것도 어느 정도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전라도 사람들은 앞에서는 잘해주면서 나중에 뒤통수 친다'는 말은,
제가 나름대로 생각한 이 경향성에 대해 나쁜 면만 부각한 표현인 것 같아요.
또한, 현대사에서의 지역주의(정치권력의 의도에 맞춰 조장된)로 인한 아주 나쁜 폐해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파악한 두 특징 (정과 흥이 많으나 자존심이 강한) 이 그런 선입견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다행히 저는 이 지역 문화와 코드가 잘 맞는 편이에요.
저희 시부모님, 배움은 길지 않으셨지만 훌륭한 인품이시고, 제 남편, 존경합니다. (여보, 사랑해. ㅋㅋ)
친정 부모님도 인정하시는 바랍니다.
시댁 친척분들, 동네분들.
아주 가끔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따뜻하고 편안하고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눈치가 없고 둔한 편이랍니다.
아주 전형적인 머리형 인간이고, 결혼하고 보니 정말 제가 서울깍쟁이란 게 그제서야 느껴졌어요.
제 남편과 시댁과 시댁 주변으로 인해
저는 나만이 옳다 생각했던 시야에서 벗어나 좀더 여유있고 재치있는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이쪽 문화를 사랑합니다.
제 아이들은 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외가(제 친정)도 자랑스럽게 느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아이들 취학 전 이삼 년만 시댁 동네에서 살아볼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어쩌면 이런 글 자체가 그 지역 분들에겐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타 지역 사람이 잠깐 보고 겪은 것 가지고 경향성이 어쩌니 저쩌니 함부로 말하는 일은 아주 기분 나쁜 일이지요.
그럼에도 용기를 내 굳이 이 글을 쓰는 건
항간에 떠도는 잘못된 선입견( 앞에서 말했듯 현대사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조장, 과장, 유포된 측면까지 있는)을
지켜만 보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시댁 자랑? 겸 이렇게 밤 늦게... (아, 젖이 불어오네요. 요새 밤중수유 끊느라 초큼 고생중 ^^;)
그러니 너무 기분 나쁘게만 생각지 말아주세요.
저는 전라도, 경상도 문제보다는
수도권, 지방으로 나뉘는 '수도권 집중화'문제가 훨씬 심각하다고 보거든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게 느껴져요.
이 모든 이야기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비전문적인 잡설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분석적으로 생각하고 머리 아파하진 마세요.
저는 이만 불어버린 젖을 해결하러... ^^;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