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카페 행복한 왕자에 준하가 (6학년 여학생인데, 이끼이끼쓰루란 일본어가 잘 어울리는 아이랍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는 고야의 그림도 보고 싶다는 리플을 달아놓아서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 전에도 이 화가 저 화가의 그림을 보고 싶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서 즐겁게 르노와르와 고흐의 그림도 찾아서 올렸거든요.
그런 피드백이 아이에게서 온다는 것은 이 카페를 만들고 가장 기쁜 일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네요.
프라도 미술관에 가기 전 고야,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그의 그림이 이 곳에 여러 점 있다는 말을 듣고 ) 등 화가에 대한
사전 공부를 엄청 했지만 막상 그림 앞에 서니 그런 기본 지식보다 그림이 압도하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캔버스속에서 살아있는 것같은 친촌 백작부인, 그녀의 옷을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오래 오래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그 곳에서 마그네틱으로 구입해서 지금도 냉장고 앞에 서면 매일 만나는 중이라 평생의 친구가 된 작품이기도 하네요.
색의 농담으로도 공간감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옅은 색속에서 솟아난 개의 머리,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내 시선도 움직이면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상상하게 되는데 내 마음에 따라 상상의 내용도 달라진다는 재미를 느끼면서 보게 되기도 하고요.
화가의 자화상인데요, 물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 저런 차림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그럴 수도 있을까요?
이런 차림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은 화가란 직업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것인가, 왜 고야는 이런 자화상을 그렸을까? 갑자기
아침부터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고야의 그림을 여러 차례 검색해서 보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눈길을 끈 작품이기도 한데요
유디쓰와 홀로페르네스의 여러 버전을 보았지만 고야의 것으로는 처음 봅니다. 제겐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의 작업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어서 다른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렵던데, 이 작품은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서 다시 보고 다시 보게 되는군요.
칼 가는 사람을 그린 이 그림,초기의 그림에 비하면 상당히 리얼리즘에 육박하는 기운을 느끼게 하는 그림입니다.
당대의 잘 나가는 화가가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두 그림의 구도를 보니까 마네가 스페인에 가서 느낀 충격과 영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네의 그림에서 차용한 이 구도, 그러다 보니 다음 번에는 마네의 그림을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아니 벨라스케스의 그림도 함께 볼꺼나 싶기도 하고.
아니 그 이전에 고야의 유령이란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림을 보는 일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생겨나게 하는
참 특별한 일이랍니다.
도판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이 작품, 당시의 왕가 초상화를 이렇게 정직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한 가족의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저 뒤 켄버스 앞에 선 고야,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어서 고야도 자신의 빛나는 선배 화가를 참조했겠지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고요.
위의 작품에서 글씨에 눈이 번쩍, 이것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 효과가 드러난 것인데요, 무슨 일이야?
라는 간단한 말이지만 그 안에 이 여인의 변화를 보고 놀라는 마음이 담긴 느낌이네요.
이 작품을 보다 보니 티치아노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얼굴을 그린, 그리고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그림을
연상하게 되기도 하고요.
p.s
준하야 덕분에 선생님도 좋은 시간이 되었단다. 사양하지 말고 언제라도 보고 싶은 화가의 이름을 적어두면
그 요청에 답하는 김에 선생님도 이전에 못 보던 작품에도 눈길을 주고, 이미 알고 있는 그림과도 다시 친해질 시간을 갖게 될 것 같으니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