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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늙은 호박전 두가지

| 조회수 : 10,464 | 추천수 : 4
작성일 : 2016-09-09 15:38:26

#1

토요일

H 씨는 긴팔 옷과 이불과 먹을 것을 챙겨 K 에게 갔던 지난 토요일 .

‘ 아침 일찍 갔으니 , K 와 늦은 아침 먹고 놀다 오후에나 오겠다 .’ 싶었다 .

느긋이 커피마시며 신문 읽다가 잠이 들었다 . 11 시쯤 일어났다 . 부재중 전화가 있다 . H 씨다 . 집에 오는 길이란다 .

주섬주섬 치우고 청소기 돌렸다 . 굴러다니던 컵 , 접시 따위를 모아 설거지 하는데 H 씨 들어온다 .

양손엔 보따리가 가득이다 . 새것으로 바꿔주고 가져온 K 의 침구와 지난주 가져다 준 음식이다 .

나는 질색하지만 H 씨 마음은 다른가 보다 .

“ 일찍 왔네 ?” 라는 물음에 “ 모임 있다고 일찍 나갔더라고 . 미역국 끓여 놓고 그냥 왔어 ” 라며 배고프다 한다 .

가져온 음식들을 가리키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더니

“ 안 먹을 건 뻔하고 놔두면 아깝잖아 . 우리라도 먹어야지 ” 라고 한다 .

순간 ‘ 그러니까 왜 해다 주냐고 ’ 짜증이 몰려왔지만 참았다 .



K 의 냉장고서 나왔다는 볶은 어묵 약간과 김치 한줌 썰어 넣고 다시마 물에 팔팔 끓였다 . 김칫국 냄새가 날 즈음 ,

콩나물과 역시 K 에게서 가져온 찬밥을 넣었다 .

중불로 줄이고 밥이 퍼져갈 때 파를 넣고 간을 봤다 . 생각보다 싱겁고 단맛이 많다 .

어묵 볶을 때 단맛을 내기 위해 뭔가 넣은 모양이다 . 부랴부랴 매운 고추 숭덩숭덩 썰어 넣고

고추장아찌 간장으로 간을 맞췄다 . 매운 맛이 단 맛을 잡아주기 바라면서 . 불을 끄고 한소끔 식히며 고추는 건져냈다 .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방울과 깨를 얹어 낸 김치국밥쯤 되겠다 .



점심 먹고 뒹굴 거리는데 , H 씨 부엌에서 뭔가 한다 . “ 뭐 해요 ?” 묻자 . “ 생채하려고 ” 라고 답한다 . 부엌에 가봤다 .

H 씨 말라가고 있는 무 반 토막을 채 썰고 있다 . 그렇게 무생채를 담갔다 . 반찬통 반통쯤 .



자연스럽게 저녁은 ‘ 갓 지은 밥에 생채 넣은 비빔밥 ’ 이 되었다 .

약간의 쌀과 남은 찬밥 가지를 썰어 넣고 새 밥을 지었다 . 생채 넣고 비빔밥도 좋고 양념간장에 비벼먹어도 좋으리라 .

밥을 하는 동안 점심에 먹고 남은 어묵볶음을 버섯과 통마늘 파 등을 더 넣고 맵게 다시 볶았다 .



 

#2

일요일

아침 일찍 텃밭에 갔다 . 커피와 샌드위치 만들어 .

좀 늦었지만 무씨 뿌리고 배추 모종 심고 작물을 걷었다 . 올해는 호박이 잘된다 . 크기는 작지만 늙은 호박이 많이 열렸다 . 그렇게 두어 시간 밭에서 놀다가 나무그늘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돌아와 씻고 나니 12 시가 넘었다 .

늙은 호박을 칼끝으로 쪼개 씨앗은 씨앗대로 말리고 껍질 벗겨 적당한 크기로 썰어 정리하고 있는데 H 씨 오더니 “ 맛있는 냄새 나네 , 단내가 확 퍼져 ” 라고 말한다 . “ 호박전 해먹을까 ?” 묻기에 “ 그럽시다 .” 했다 . 채 썬 늙은 호박과 풋고추 넣고 부침가루 반죽으로 지져낸 H 씨의 호박전 . 달달하니 휴일 간식으로 그만이었다 .



간식으로 시작한 호박전을 배불리 먹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 저녁 무렵 배가 꺼져갈 때쯤 .

호박을 좀 더 잘게 잘라 블렌더로 드르륵 갈았다 . 적당량의 밀가루와 섞어 다른 버전의 호박전을 부쳤다 . 질척이기에 밥공기 크기만큼 작게 부쳐냈다 . 질척이는 식감이지만 호박 단맛은 더 많다 . 살짝 호박죽 맛도 나고 . “ 식어도 먹을 만하겠는데 , 더 해요 . 내일 도시락으로 가져가게 ” 라고 H 씨 주문도 받은 일요일이었다 . 늙은 호박과 씨름한 늙어가는 남녀의 기억엔 .



 

#3

‘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끼는 건 기억 때문 ’ 이라고 한다 . 하루 일이 세세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과 드문드문 흐릿한 기억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 지난 주말을 돌아보면 맞는 말 같다 . 분명 다른 일들도 있었을 텐데 기억나는 건 딱 저기 까지다 . 그것도 찍어둔 음식사진을 보며 겨우 떠올린 것이다 .

기억 덕분에 음식만큼이나 참 간결한 시간을 보내는 요즘이다 . 비록 낮에 먹은 음식조차 생각나지 않아 ‘ 멍 ’ 할 때가 있지만 화나고 짜증스러운 일 , 서운한 감정도 그만큼 흘려보낼 수 있어 좋기도 하다 .

 

누군가에겐 좋고 또 누군가에겐 걱정일 명절이 다가옵니다 .

부디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

1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테디베어
    '16.9.9 5:27 PM

    동화속에 사시는 것 같아요 우후에님~~
    김치국밥 늙은호박전 너무 맛있겠습니다^^

  • 오후에
    '16.9.20 5:37 PM

    좀 기운없을 때 김치국밥 좋죠.

  • 2. 존심
    '16.9.9 7:36 PM

    국시기 갱시기

  • 오후에
    '16.9.20 5:38 PM

    ㅎㅎ 국시기 갱시기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네요
    정겨운 말이지만 양을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음식이니 좀 서글픈 말이기도 해요

  • 3. 게으른농부
    '16.9.9 8:49 PM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전~ 맛보고 싶네요. ^ ^

  • 오후에
    '16.9.20 5:40 PM

    호박전 맛보셨나요? 추석 전들에 밀려 좀 힘드셨을 것 같은데
    쌀쌀해졌는데 전보다 호박죽 드셔요

  • 4. 새벽아침
    '16.9.9 11:55 PM

    아이가 외출을 해서 오늘은 K에게 쓰는 편지를 안 쓰셨나봐요.
    오후에님 호적과 아무 상관없는 남의집 늙은 딸이 기다립니다.^^;

  • 오후에
    '16.9.20 5:42 PM

    저도 K본지가 오래라...ㅠㅠ
    기다리진 마시옵서서
    기다림은 뭐든 짠하거든요

  • 5. 부관훼리
    '16.9.10 8:26 AM

    저희도 텃밭에서 따온 호박을 어떻게 손을 봐야하는데
    저렇게 부쳐먹으면 좋겠네요. 아이디어 받아갑니다. ^^

  • 오후에
    '16.9.20 5:43 PM

    늙은호박요?
    손질이 힘들지만 쓰임이 많은 재료죠. 맛도 건강에도 좋고

  • 6. 노호호
    '16.9.27 4:43 PM

    저 늙은호박전 환장하는데..
    앉은뱅이밀가루, 물, 소금, 채썬 늙은호박.
    딱 요래만 넣어요 가끔 계란넣고.
    아 먹고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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