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중 하던 일을 하나 마무리하고, 계속 해야 하나, 아니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야 하나
망서리다가 도서관 가는 길의 가을을 느껴보고 싶어서 길을 나섰습니다. 일상에서는 여행을 나서기 어려운
시간을 살고 있는지라 동네에서 사계절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중, 이런 날, 와 탄성이 절로 나더라고요.
오고 가던 시간에 본 풍경이 집에 오니 저절로 피사로의 그림을 찾아보게 합니다.
미술사를 뒤바꾼 화가는 아니더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화가,그래서 가끔 찾아보게 하는 그런 화가입니다.
피사로는 제게
지금부터 15년전, 아주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만 처음으로 보람이와 비행기를 타고 해외 여행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긴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것은 지금도 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동생이 내가
있을 때 오면 안내할 수 있으니까 눈 딱 감고 시간을 내서 오라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멀미가 날 정도로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당황하던 순간이 지나고 나니 제게도 앗 아, 이런 식의 놀라운 소리가 나게 만드는 몇 가지
그림과 만났고 그 때부터 그림과의 은밀한 사귐이 계속되고 있네요,. 은밀하던 사귐이 공개적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것으로 변하고 이제는 건축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담고서 바라보게 있는 중입니다.
해마다 모아온 그림엽서도 제법 두둑해졌지만 오래 되니 이제 처음처럼 신선한 눈으로 엽서를 보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엽서 꾸러미를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한 장씩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가지라고 하고 있지요.
아이들에겐 고르고 골라서 한 장 뽑은 그 엽서가 새로운 계기가 될지도 몰라서요.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는 그런
비밀스러운 계기가.
베네수엘라, 제겐 지명에 불과하던 나라가 오케스트라로 인해 가보고 싶은 나라, 관심이 증폭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피사로가 그린 베네수엘라, 제목만 보고도 공연히 클릭해서 그림을 보게 되는 것이 재미있네요.
오늘 도서관에 갈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한 권 골라왔는데 그 안에는 동굴 벽화에 대한 글이 들어있었습니다.
갑자기 웬 동굴 벽화인가 싶겠지만 토요일 역사반 아이들과 동굴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동영상에서
찾아서 자료를 올리기로 약속하고 어제 밤 집에 와서 유투브 검색을 하다가 쇼베 동굴을 만났습니다.
사유와 매혹에서 몇 컷 본 쇼베 동굴 그림도 놀라웠지만 동굴 안을 직접 촬영해서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몸속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더군요. 그래서였겠지요? 그 책을 자연스럽게 뽑아서 빌려오게 된 것은
그러니 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관심이 달라진 것이지만 그 자리의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눈이 달라진
것일까 하고 느끼게 되는 착각이 재미있습니다.
이 그림은 달래가 뽑아서 들고 간 엽서인데요 오늘 보니 피사로의 세 번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네요. 당연히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해주면 달래의 반응이 어떨까 상상하게 됩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서 그림을 그린 피사로, 그래서일까요? 19세기로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더라고요.그의 그림을 보는 일은
그림을 보다 보니 다른 해에 비해서 이번 초겨울에는 쓸쓸함에 대해서 소멸에 대해서 덜 생각하고 지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그만큼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조금 더 단단해진걸까, 둘 다일까?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는 sunset 역시 대화도서관에 다녀온 짧은 나들이가 가져다 준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