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유 게시판>에서, 한 엄마가 올리신 ‘3살 된 딸아이의 문장력’을 읽어보고
가슴이 ‘뭉클!’하여 그 맑고 사랑이 감도는 어여쁜 글에 그림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이 3살 된 어린이의 짧고 단순한 2편의 시적인 언어를 통해, 시인의 작품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정신과 더불어 따스한 ‘풍요로움’을 맛보았는데요,
문득, 저는 3살 때 어땠을까 떠올리며 아침저녁의 선선한 기운으로 인해, “이제는
가을에 접어드나 보다.”하고 움츠러들던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낄 수가 있었네요.
사람은 누구나 ‘천심天心’이 담긴 동심을 지닌 어린애로 출발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그 마음을 상실해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거나 때로는 어떠한 사정事情 때문에
현실에 예종隸從돼가기 때문이겠지요.
크레용을 쥐고 새하얀 도화지에 해님, 달님을 그리던 손이 재물에 집착하는 손으로
변하게 됩니다. 풍진 세상에서 항상 해맑은 어린이 마음을 지니고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게 또한 세상사의 모순이기도 하죠.
그러나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듯이 때때로 <동심>으로
돌아갔을 때 들려오는 참 소리들이 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두운 현실과 절망 속에서도 푸른 마음이고, 늘 <무지개>를 꿈꾸기에
이 지상의 아이들은 언제나 경탄하며, 시인처럼 말하고 ‘단순하게’ 표현하지요.
반면에 대부분의 어른들은 감성이 결핍된 냉가슴의 소유자들이고, 말에는 장광설이
많지 않던가요?
오늘 일상의 분주함속에서 모처럼 한 어린이의 천성어린 <예쁜 시>로 인해, 세상의
번뇌로부터 잠시 풀려날 수 있었답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닮은,
맑고 푸른 하늘!
《복음서》에는 “어린이처럼 되어라.” 하였고 맹자는 “대인 大人 이란 그
어린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자이다.”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맹자 離婁 하편 12장)라고 말하고 있는데,
특히 《복음서》의 이 말에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었지요.
― “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가? ........ ”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해온 바를 정리해보면,
어린이의 마음은 천심天心이다.
어린이는 ‘자연’을 닮았기 때문에 작위성作爲性이 없으며 어른들처럼 어떤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그 마음에는 일체의 ‘상업성商業性’이 없기에 계산을 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무분별심無分別心), 열린 마음이다.
동심은 선線을 긋지 않는 마음이다.(어른들은 ‘선 긋기’의 대가들로서
<강북>과 <강남>이 이래서 생김)
어린이는 일심一心, 즉 분열되지 않은 오롯이 ‘한마음’이며
자신이 보는 것에만 마음이 집중되고 있다.
(어른들은 잡심이 많은 혼란된 마음이라서, 자신이 보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산만해 있다)
동심은 필요를 넘어선 탐욕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탐욕의
무게로부터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이 동심이고, 그것이 바로 초탈이며
자유다!
이리 써놓고 보니 영국 시인 워즈워드Wordsworth가 <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라고 말한 이유가 이래서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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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글 ―
제목: 3살 된 딸아이의 문장력 수준
http://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354147&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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