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에 반체제 활동으로 시인 김지하가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옥중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생략)
......
이름 모를 도둑님들이 악을 악을 쓰면서 나를 욕하는 소리다.
“야! 김지하, 이 개새끼야! 요 며칠 전에 미국 국회에서 한국문제 심각하다고 떠들어댄 것도 모르냐,
이 새끼야! 그것도 모르는 게 무슨 빠삐용이야, 이 얼간이 같은 새끼야!”
“야! 이 씨팔놈의 김지하야! 어저께 연대 앞에서 화염병이 400개 터진 걸 아냐, 모르냐? 이 더러운 먹물 새끼야!”
이런 식이다.
또 있다.
전라도 조폭의 앞 뒤 세 우두머리가 ‘오기준’과 ‘조양은’과 ‘김태촌’인데 김태촌은 난 만난 일이 없고, 오기준과 조양은은 평소 삼천리독보권(三千里獨步權, 교도관의 감시 없이 구치소 내를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처지에서겠지만 바나나나 카스텔라 같은 맛있는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와 내 방의 담당 교도관에게 다 준다.
그러면 교도관은 혼자 먹기에 너무 양이 많아 나에게 나눠 주거나 눈치를 채고는 그냥 내게 넘기곤 한다. 그 중간 중간에 내게 하는 것 같지 않게 잡답하듯 세상 소식을 떠들어댄다. 그래도 전라도랍시고 의리 지키는 거겠지? 그게 아니다. 그 무렵에는 양심선언 때문에 내가 조폭세계에서 ‘빠삐용’으로 통하고 있어서였다.
또 있다.
내가 뽕짝 좋아하는 걸 다 알고 도둑님들이 저녁통방 시간에 나와 가요 경연대회를 여는 것이다.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노래 직전 ‘헌정’하는 친구가 있어서다.
“‘빠삐용’ 형님께 ‘돌아와요 부산항’을 한 곡조 바칩니다.”
구치소 뒤 안산이 다 떠나가게 갈가마귀 소리 소리 큰소리로,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는데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운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하도 많이 들어 입으로 줄줄 외울 정도로 많은 ‘헌정’을 받았으니
울기도 여러 번이다.
출옥 직후 나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내가 그 노래를 불렀더니 그걸 어찌
알았느냐고 모두들 놀랐는데 내가 물어 왈,
“그게 누구 노래지?”
“조용필이야.”
"조용필…? 조용필…?”
그 무렵 KBS에 있던 한국 최고의 다큐멘털리스트라는 정수웅 형에게
조용필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더니 만나게 해 주었다.
여의도의 한
맥주집에서였다.
조용필 아우가 처음 만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왈,
“저는 대중가수예요.”
자기를 낮추어 겸손해 하는 말이었다.
내가 바로 대답하여 왈,
“나는 대중시인일세.”
그러나 내 말은 나를 낮추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나를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른바 대중에게 빚이 너무 많아서다.
그러나 지금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음악이 하나 있으니, 감옥 내의 그 끝없는 확성기 소리로 떠들어대는 박정희의 소리 ‘나의 조국’이다.
인용하지 않겠다.
조건반사라 하던가.
하도 많이 들어 놓으니 걸레질하면서도, 걸으면서도 흥얼흥얼 ‘나의 조국’이었다.
그러매 나는 그 긴 세월 박정희에게 한 마리의 흰 쥐였다. 단지 내가 쥐를 도리어 유신시대에 저항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심지어 변소에 앉아 ‘씨팔’ 소리 한 번도 없이 조용히 산 사람들보다 양심선언의 글자 한 자를 운반하던 그 쥐를 도리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차이뿐이었다.
아아, 그 어떤 우스꽝스러운 일도 서글픈 일도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 모두
다 빛 바랜 한낱 이야깃거리로밖에는 안 남는 이 시간이라는 이름의 지속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