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일보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884873?sid=100)
서울의 고등학교 교사 A씨는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는 시간을 가졌다가 충격을 받았다. 한 아이가 특정곡을 신청하자 많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는데, 알고보니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노래였다. A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제대로 아는 아이들은 없었다. 해당 교사는 "학교를 떠나고 싶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극우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밈(인터넷 유행물)'과 '놀이'로 소비되던 혐오 현상이 학교까지 파고들면서, 지금 10대는 'MH세대(노무현 조롱 세대·2003년~2008년생 남성)'라는 우려스러운 타이틀까지 얻었다.
교사는 교실 속 아이들의 생활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다. 학생들이 툭툭 던지는 말이나 행동 등을 통해 아이들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한다. 교사들은 요즘 10대들의 정치·사회 인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본지는 현직 초중고교 8명(교장급 2명 포함)과 예비 교사를 가르치는 교대·교원대 교수 2명 등 총 10명을 심층 인터뷰해 교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과 학생들의 심리에 대해 물었다.
교사들은 10대들이 전반적으로 극우화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대신 뚜렷한 우경화 조짐이 있다고 했다. 특히 12·3 불법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을 거치며 학생들이 진보 진영 정치인을 조롱·혐오하는 발언을 더 흔히 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남자 아이들에게 극우는 '놀이'다. 유튜브나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에서 게임이나 스포츠 콘텐츠를 보다가 알고리즘에 엮인 정치 동영상 등을 우연히 열어본 10대들이 많다. 이들은 극우 콘텐츠를 '밈'으로 소비하며 깊은 생각 없이 깔깔거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우편향 사고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온라인 속에서 본 표현을 교실로도 끌고 나와 또래들에게 전파한다. 최근까지 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했던 A씨는 "평소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아이가 '찢재명(이재명 대통령 비하 표현)'이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해 놀란 적이 있다"면서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간첩을 잡겠다'고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극우 인터넷 세상에서 가장 많은 밈이 있는 정치인인 까닭에 일부 아이들은 그를 놀잇감처럼 활용한다.
일부 청소년들은 계엄이 남자다운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고등학생인 아들을 키우는 권정민 서울교대 교수는 "남자 아이들끼리 '계엄은 낭만'이라는 표현을 쓰며 쿨하게 받아들인다"며 "반면 계엄을 해제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국회 담장을 넘어간 행위는 쿨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교사들도 공격받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정미라 경기 병점고 교사는 "선생님이 수업 중 공공교육이나 복지의 가치 등을 설명하면 수업이 끝난 뒤 친구들 사이에서 교사를 비난하며 '빨갱이' '민주당 골수'라고 부르는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성향의 학생이 절대다수인 건 아니지만 만약 교내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학교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략)
일상에서 겪는 경험들이 10대 남성들을 우경화하게 만든다는 해석도 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남녀공학에서 수행평가를 하면 상대적으로 꼼꼼한 성향의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좋은 성적을 얻는 경우가 많다"면서 "내신의 바닥은 남자가 깔아준다'는 인식이 퍼지는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데 이를 정치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남녀 청소년 간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이 다른 점도 10대 남성의 보수화를 부추긴다. 김성천 교수는 "여자 청소년들은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주로 또래와 대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소한다"면서 "반면 남자아이들은 주로 게임 등 혼자 즐기는 여가를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경향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극우 콘텐츠에 빠지거나 고립돼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