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우키시마호의 비극에 대해 까맣게 몰랐던 제 자신이 부끄럽네요.
해방된 조선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계획적으로 현해탄에 수장된
5천여 강제징용 조선인 넋을 늦게나마 기립니다.
패망이후 쭈욱 반성할 줄 모르고 발뺌과 오리발과 적반하장으로 일관된
일본극우정권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다시금 분노를 느낍니다.
아래는 우키시마호에 대해 간략히 알아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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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직후, 일본은 강제징용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극비리에 송환(폭침) 계획을 세웁니다.
“이 배가 조선(부산항)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다!”
“이 배를 타지 않으면 더 이상 배급은 없다!”라는 일본 해군의 강압에 따라
훗카이도, 아오모리, 도호쿠 일대로 끌려갔던 강제노역 조선인 약 7000명은 5천톤급 일본 해군 화물선 우키시마호에 서둘러 탑승하였고 아오모리현을 출항합니다.
1945년 8월 22일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이상하게도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마이즈루항 입구에서 멈추더니 갑자기 폭발해 침몰했습니다.
그 시각이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일본측은 미군이 마이즈루항 연해에 매설한 기뢰에 부딪혀서 폭발한 단순 해난사고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갑자기 조선인들을 배밑으로 내려가도록 채근한 사이 구명보트를 타고 배를 빠져나갔고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
“엄마 젖을 먹는 어느 아기를 보고 ‘저 애도 곧 죽겠군’이라고 일본군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폭발음이 3~4회 들렸다. 일본주장대로 미군 기뢰가 터진거라면 폭발음이 서너번 들릴 리도 없고 수십m의 물기둥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다.
게다가 부산을 향해 출항한 우키시마호는 이상하게도 편도 기름만 채운 상태였다.
침몰한 우키시마호는 그후 9년이나 해저에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1954년 민간기업에 의해 인양되어 조각 조각 해체되어 고철로 팔아넘겨졌다. 인양당시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진 것으로 보아서 해저 기뢰가 아닌 선체 내부로부터 폭발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었다.
2016년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은 그 배에 폭발물이 실려있었다는 일본 방위성 문서를 입수해서 공개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60808141751051
애초에 승선 명부를 작성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승선자와 사망자를 알 수가 없었다. 일본측은 처음에 한국인 3725명중 52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연합군 사령부에는 256명이 사망했다고 축소 보고했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7000~7500명이 탑승했다고 한다. 세계 역대선박침몰사고 데이터를 검색하면 6위를 선점한 우키시마호 사망자는 5000명 이상으로 기재되어있다.
1977년 NHK다큐 <폭침>으로
철저히 은폐되었던 우키시마 폭침사건이 세상에 알려졌고,
2001년 교토지방재판소는 일본정부의 안전배제의무위반을 근거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이를 번복하여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일본정부의 책임이 있다한들, 이미 1965년 박정희가 맺은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이 끝났다는 주장이었다.
현재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우키시마 희생자 위령비가 있고
일본 사고해역근처 외딴섬에 일본 민간단체가 마련한 순난의 비가 있다.
1994년 일본에서 제작한 <아시안 블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ppypress&logNo=220781059074&pa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