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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동행

소설 조회수 : 472
작성일 : 2017-01-22 11:42:16

동행 (저자: 최일남, 발표일:1959. 1)



잿빛 블랭킷(담요)으로 차일을 쳐 놓은 것 같은 하늘에서는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 주위는 음산하기만 하였다. 흑인 이등병 돕프는 이제 더 걷고 싶은 기력조차 없었다. 부대를 잃은 지 이틀째, 끝없는 산과 골짜기 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물통과 옥수숫가루가 들어 있는 깡통 하나를 남기고 다른 짐은 이미 다 버린 지 오래고 카빈총도 마저 버리려다가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추위와 허기증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갈증이 더 무서웠다. 아무라도 좋으니 우선 사람을 만났으면 싶었다. 혼자 걷는 길은 피로가 더 쉬이 오고 외롭고 불안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다가 지쳐 쓰러져 죽지나 않을까 생각하면 왈칵 겁이 났다. 코리아에 온 지 오 개월. 고향 플로리다 반도를 떠나올 때는 한여름이었다. 코리아에 오자마자 바로 포 부대에 편성되어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어 왔었다. 부대가 평양을 지났을 때 전쟁은 다 끝난 것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전세는 다시 악화되어 갔다. 후퇴명령을 받은 돕프 부대가 산골길로 후퇴할 때 잠복 중이던 패잔병들의 협공을 받았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돕프 부대원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싸우고 있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부대의 중심 세력에서 혼자 떨어져 있던 돕프가 중대 쪽으로 가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바로 십여 미터 앞에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부대 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더듬어 달려갔으나 총소리가 자꾸만 멀어져, 길을 잘못 들었다 싶었을 땐 이미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돕프는 바람이 안 들어올 만한 움푹 파인 곳을 찾아 아무렇게나 누워 버렸다. 눈앞에 정든 고향 풍경이 전개되어 갔다. 돕프는 누운 채 다리를 모아 무릎을 세우고 오늘밤은 이곳에서 새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자세로 얼마를 지났을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데 어디선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돕프는 개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어둠 속을 헤치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한참을 가다 보니 뜻밖에도 저만치 앞에 그럴싸한 집채가 보였다.

초가집이었다. 개는 여전히 짖고 있었다. 집은 세 채가 있었다. 개는 대문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돕프는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개 짖는 소리가 그치자 안방에서 애기 우는소리가 들려 왔다. 방문을 열어 젖혔다. 방 한편에 담요로 몸을 돌돌 만 어린애가 누워 울어댈 뿐 아무도 없었다. 돕프가 아이를 안아서 보니 생후 6개월쯤 되어 보이는데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돕프는 막막해서 우는 아이를 도로 뉘어 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 집이나 좀 조용한 곳에 가서 푹 자고 싶었다. 옆집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혼자 남겨 두고 온 아이 우는소리와 개소리에만 신경이 쏠렸다.

돕프는 아이와 개를 놓고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돕프는 다시 일어나 아이 있는 집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열에 들떠 우는 아이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밖에서 킹킹대는 개도 방안에 데려왔다. 돕프는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떠보니 방문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오싹 오한이 들었다. 돕프는 개를 밀치고 얼른 아이를 굽어다 보았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가는 소리로 무엇인가 혼자 재잘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먹을 것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방 벽장 안에서 여남은 알의 곰팡이난 감자가 굴러 나왔다. 흙만 슬슬 문지르고 베어먹었다. 개에게도 나누어주었다. 돕프는 이제 아무래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방안에 들어갔다. 아이에게 가는 마음을 애써 돌리며 돌아섰다. 순간 아이가 <앵앵> 울어댔다. 돕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서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뜨린 아이에게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혈육지간 같은 친근감이 치올라 왔다. 이이를 일으켜 안았다. 개도 따라나섰다.

집 앞에 나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개 이름은 고향에 있는 개 이름을 따서 벳지라 부르기로 하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돕프는 일찍이 본 일이 없었던 눈이기에 그것을 보는 것이 제일 즐거웠다. 아이는 또 자꾸 울기 시작했다. 눈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카빈총을 마른 숲 속에 던져 버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양팔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 갔다. 그럴수록 더 힘을 내어 고쳐 안았다. 아이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자기의 목숨도 다할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 깃들기 시작하였다. 돕프는 아직 아이의 성별도 몰랐다. 벌써 눈은 완전히 발등을 뒤덮게 쌓였고 길의 방향도 알지 못했지만 돕프는 겁날 것이 없었다. 동행을 얻은 것이 한결 흐뭇할 뿐이었다.

다리가 피곤하여 쉬어 갈 만한 곳을 물색하였다. 눈이 쌓이지 않은 덩굴 아래에 아이를 안은 채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얼마 남지 않은 옥수숫가루를 털어 개와 나누어 먹었다. 아이이 입에도 넣어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오히려 악을 쓰며 돕프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 젖을 찾는 모양이었다. 돕프는 입가에 어설픈 웃음을 띠며 자기 가슴을 헤쳤다. 돕프는 아이의 입술을 자기 젖꼭지에 갖다 대었다. 아이는 숨도 쉬지 않고 빨아 댔다.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 놓고 볼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아이의 생명은 돕프 자기 생명의 상징이라고만 여겨졌다.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쌓인 눈 때문에 도저히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상하다 싶어 들여다보았더니 입술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 갈증이 일어난 모양이다. 갑자기 자기도 심한 갈증을 느꼈다. 눈을 한 주먹 집어먹었다. 두 번 세 번 연신 먹어도 갈증은 여전했다. 아이의 입에도 눈송이를 물려주었으나 조금치도 먹지 못했다. 돕프는 빈 물통을 빼어 들고 군복 바지 단추를 풀었다. 몸이 오싹해지며 누런 액체가 물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신비롭게 들렸다. 돕프는 다시 물통에 눈을 섞어 넣어 눈을 감고 마셨다. 맛을 느끼기 전 갈증이 메워져 가는 쾌감이 좋았다. 아이의 입에도 몇 모금 흘려넣어주었다. 돕프는 자기가 갑자기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 같았다. 그것이 싫지 않은 것이 또 이상하다면 이상하였다. 또다시 얼마를 걸어왔을까. 주위가 어둡기 시작했다. 더 어두워 오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를 헤매던 끝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 몸을 쉬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이도 울기에 지쳤는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잠이 들었다. 벳지도 완전히 힘이 없어 보였다.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섭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돕프는 바닥에 누운 채 아이를 힘있게 안으며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이야, 우리는 하마터면 서로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혼자 외로이 죽을 뻔했구나.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야. 우리가 이렇게 만나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해야지. 벳지 너도. 우리 아버지는 지금쯤 나의 결혼준비를 서두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허지만 우리는 모두 여기서 우리들의 짧은 생애를 끝맺어야 할 것 같아. 물론 우리들의 의사는 아니지."

아침 햇살이 나무 가지 사이로 찬연히 비쳐 왔다. 벳지는 해가 떴어도 일어날 줄 모르는 두 주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끙끙대었다. 그래도 일어날 징조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짖어 대었다. 아무리 짖어도 꼬옥 껴안은 채 누워 있는 두 몸뚱이는 움직일 줄 몰랐다. 벳지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친 듯이 언제까지고 짖어 댔다. "윙 윙윙....." 벳지가 짖는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퍼져 가듯 온산에 슬프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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