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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버린 이승만, 돌아와서는 사죄 대신 '학살'

학살자 조회수 : 1,055
작성일 : 2015-11-03 18:49:1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5916

낙동강까지 밀렸던 미군과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렸다. 9월 28일에는 서울 광화문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9월 29일 김포비행장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도착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까지 시가행진에 참여한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은 공산군 치하에서 빨갛게 물든, 사상이 불순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런 시민들이었다. 거짓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서울 도착 후 시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되찾은 뒤에 벌어진 일들은 부역자 처단 작업이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에는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이승만 정권은 좌익 부역 혐의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9월 28일부터 강력한 부역자 검거 열풍이 불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심사를 맡았다. 각 시도 경찰국이 부역자에 대한 신고를 유도하는 등 부역자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 이런 부역자 검거 광풍은 곧바로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은 불법이었고 그런 이유로 무자비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억류 단계에서 이미 테러에 가까운 폭력적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군사적 상황과 수형 시설 부족을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신속히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적 비난이 빗발치고 여론의 반발이 일어났다. 주미대사 무초가 나서서 이승만의 자중을 요청하는 등 진화에 나서야만 했다.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은 곤혹스런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살려준 것은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살려준 것이 이승만뿐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무부장관 애치슨은 '드디어 미국이 살게 되었다'며 환호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내리막길을 준비하던 미국의 군수산업체와 군부는 전쟁 산업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의 군수 지원기지가 됨으로써 2차세계대전의 상처에 연고를 듬뿍 발라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남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고통은 반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전쟁이 현대사의 우여곡절 때문에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1951년 이후의 전쟁은 무의미했다. 휴전회담을 진행하는 상황인데, 38선 언저리에서 일진일퇴의 살육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북괴공산도당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거나, 미제의 괴뢰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는 수사는, 그 과정 속에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3년이나 계속됐던 한국전쟁은 동북아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판문점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된 후 우여곡절 끝에 타결된 휴전은, 대박을 노리며 판돈을 건 도박자들이 빈털터리가 되었다가 겨우 본전을 건졌다고 자위하는 꼴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을 잠시 중단하자는 정전협상은 불안정을 일상적인 체제로 두자는 것이었다. 이후 고착화된 남과 북, 동아시아의 긴장과 갈등 상태는 판문점체제가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휴전선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상징적인 국경선이었다. 무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의 비무장지대는 군사력이 세계에서 가장 집중된 곳이 되었다. 이 휴전선 북쪽의 북한과 중국은 미국에 의한 정치적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남한은 적절한 무장력을 확보해 북한과의 군사적 균형을 갖춰야 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경제 재건 역시 판문점체제의 유산이었다. 

IP : 222.233.xxx.22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5.11.3 6:52 PM (61.101.xxx.111) - 삭제된댓글

    이것도 우리의 역사죠.
    역사는 사실의 기술이라고 하는데..
    자학사관이라는 일본 우익의 이론을 가져와서 어두운 역사는 감추고 자랑할만한 부분만 부각하자는게...말이 되나요?
    부끄러운 역사에서도 배울것이 있고 다음 역사는 다르게 씌여지도록 하는것이 맞는거죠.
    하지만 2015년 오늘의 역사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자꾸 절망하게되요

  • 2. ...
    '15.11.3 6:53 PM (61.101.xxx.111)

    이것도 우리의 역사죠.
    역사는 사실의 기술이라고 하는데..
    자학사관이라는 일본 우익의 이론을 가져와서 어두운 역사는 감추고 자랑할만한 부분만 부각하자는게...말이 되나요?
    부끄러운 역사에서도 배울것이 있고 다음 역사는 나아질수 있게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것이 맞는거죠.
    하지만 2015년 오늘의 역사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자꾸 절망하게되요

  • 3. 궁서체..
    '15.11.3 7:48 PM (94.3.xxx.147)

    궁서체 시네요

  • 4. 이승만 포럼
    '15.11.3 9:13 PM (178.162.xxx.3)

    한강교 폭파는 우리 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첫째 한강교 폭파로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을 수 있었고, 둘째 미군과 UN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 군이 한강교 폭파에 실패했다면, 한강방어선 구축은 불가능했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면, 유엔안보리의 참전 결의도 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우리 군의 한강교 폭파는 친북적 민중사관에 물든 좌편향 역사학자와 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결코 섣부른 결정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군사작선 상으로 보면 늦은 판단이었다.

    나아가 한강교 폭파가 없었다면, 북한군은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기도 전에 남한 전역을 적화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 실정으로 한강표 폭파를 꼽는 좌파 역사학자와 언론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선동이나 다름이 없다. 결론적으로 한강교 폭파는 대한민국을 구한 결정적 선택이었다.

    한강교 폭파에 따른 희생자 규모도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남 연구원은 “한강교 폭파로 당시 교량을 건너던 500~800여 명과 40~50대 가량의 차량이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7만2천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강교 폭파 이전 철수한 병력은 6월 30일 기준으로 2만4천명에 불과하고, 당시 전체 우리 군 병력이 9만6천명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7만2천명이 한강교 폭파로 희생됐다는 주장은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다.“

    “당시까지 우리 군 손실은 1만4천명 정도였다. 서울전선에 투입되지 않은 후방부대 인원, 미처 동원되지 않은 인력, 한강교 폭파 이전 이미 철수한 병력, 폭파 이후 부대 복귀 인력 등을 고려하면, 우리 군과 민간인 피해는 훨씬 적은 수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마지막으로 남정옥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그후 정책을 소개하면서, 친북-반국가적 성향의 학자와 언론이 ‘이승만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초기 서울시민들을 빨리 피란시키지 못한 점을 회한으로 여겨, 1.4후퇴 이전 20여일에 걸쳐 군과 행정관서를 동원해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피란시키는 등 국민에게 아픔을 주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썼다.”

    “맥아더, 리지웨이, 밴플리트, 테일러, 클라크 장군 등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명장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하나같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지도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이승만을 여전히 폄훼하고 있어 안타깝다."

  • 5.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15.11.3 9:14 PM (178.162.xxx.3)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에 대한 좌파 진영의 원색적인 비판이 마치 정설처럼 굳어지면서, 이 부분이 아예 학문적 연구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 두 가지 문제를 '이승만의 무능과 부도덕성이 드러난 대표적 예'로 들면서, 끊임없이 비난을 가하고 있다.”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이런 비난이 역사적 사실인양 굳어져 버렸고,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을 학생들을 버리고 도망간 '세월호 선장'에 빗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정옥 연구원은 위 두 가지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상황에서 피란에 나섰는지, 한강교가 정말 조기에 폭파된 것이 맞는지, 그리고 그 결과 향후 전쟁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한강교 폭파의 실제 피해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당시 전황을 기초로 분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6.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15.11.3 9:14 PM (178.162.xxx.3)

    남정옥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피란에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전쟁 초기 상황을 소개했다.

    북한은 전쟁의 승리 조건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남침을 강행했고, 서울의 북쪽 관문인 개성과 동두천이 전쟁 당일 함락됐다. 다음날 정오쯤 서울에서 불과 18km 떨어진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돼 서울은 적의 야포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북한전투기는 전쟁 당일부터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 돌아다니며, 서울 주요 시설을 공격했다.”


    6.25전쟁 당시 수도 서울은 38선으로부터 불과 45km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는 최고시속이 55km에 달하는 북한의 T-34 전차로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의정부의 함락은 대통령의 안전이 급박한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원수의 안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전쟁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더 빨리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고 남 연구원은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났는데, 이때 대통령 옆에는 군도 경찰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장한 군이나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경무대 비서와 경호원 몇 명만 대동한 채 북한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났다.

    남 연구원에 따르면, 전쟁 발발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곧 한강교 차단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전력의 3분의 2가 수도권에 투입됐다.

    그러나 북한은 작전 미숙으로 서울을 점령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다.

  • 7.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15.11.3 9:15 PM (178.162.xxx.3)

    이와 관련된 남정옥 연구원의 발언.

    당시 남침을 저지른 북한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중국과 소련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독소전에 참가했던 위관급 장교였다.“

    “그런 이유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계획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며 작전이 지체됐다.“

    “서울로 진입할 부대들에 대한 교통통제도 이뤄지지 않아, 서울로 향하는 좁은 도로에 병력과 차량이 몰리면서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북한은 애초 서울에 진입하면 한강교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서울 진입과정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한강교가 아닌 한국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점거했다. 이 덕분에 우리 군은 한강교를 폭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계획하지 않은 것도 북한군의 ‘작전 실수’라는 것이 남 연구원의 평가다.

  • 8.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15.11.3 9:15 PM (178.162.xxx.3)

    남정옥 연구원은 이어 우리군의 한강교 폭파는 조기에 이뤄지지 않았고, 미군과 UN군 참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한강교 폭파에 대한 피해통계도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북한군 남침 당시 우리 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소련제 T-34전차였다. 우리 군에는 이를 저지할 대전차 무기가 없었다.

    실제 북한은 242대에 달하는 전차를 앞세워 개전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과 한강 이남을 잇는 한강교를 선점해 우리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우리 병사들은 북한 전차를 육탄으로 막았다. 특공대를 조직해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에 뛰어 오르고, 대전차포나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어 적 전차 밑으로 들어가 북한군 전차와 함께 산화하며, 북한군 전차를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는 너무 많았다. 북한에 전쟁 이틀 만에 서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전차의 압도적 위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 연구원은 바로 이점에서 우리 정부의 한강교 폭파는 정당했으며,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군사작전 상으로 늦은 결정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관한 남정옥 연구원의 설명.

    북한군 전차는 6월 28일 00시 30분에서 01시 사이에 서울시내에 진입했다.

    우리군은 이날 02시 30분쯤 한강교 상의 인도교를 비롯한 철교를 폭파했고, 광진교는 이보다 늦은 04시에 폭파했다.

    우리군 한강폭파는 북한군 전차가 서울시내에 진입한 걸 따지면 늦은 결정이었다.”


    남 연구원은 “한강교 폭발로 북한군은 전쟁 초기 귀중한 3일이란 시간을 서울시내에서 허비했다”며,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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