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1219100811
2008년 촛불 집회 때, 책 한 권이 주목을 받았다. 클레이 셔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송연석 옮김, 갤리온 펴냄). 셔키는 사이버 세상의 변화가 '리얼 월드'의 변화를 이끌어 내리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이 책은 그의 이런 관점을 여러 예를 통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나는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이 책을 읽으며 엉뚱한 곳을 메모해 뒀었다. 유럽에서 가장 민주화가 덜 된 국가 중의 하나인 벨로루시에서 2006년에 있었던 일이다. 독재자 알렉산더 루카센코의 3선이 조작 선거로 확정되자,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물론 독재자는 수백 명의 시민을 체포하고, 제1야당의 후보를 감금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플래시 몹(flash mob)'을 제안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경찰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을 연행했다. 몇 개월 지난 후, 이번에는 광장에서 '서로 미소를 보이며 걷자'는 제안이 올라왔다. 역시 경찰은 웃으며 시민을 연행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거론하면서도 셔키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경찰이 플래시 몹을 사전에 막을 수 없었던 것, 플래시 몹 사진과 같은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계속 유포될 수 있는 것 등이 바로 이런 낙관의 근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갑자기 벨로루시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2013년의 대한민국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며칠 전부터 대학가에서 시작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10대, 20대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으며 사이버 공간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게시판에서 진행 중인 '의료 민영화 반대' 서명에는 2013년 12월 19일 현재 8만1679명이 동참했다. 애초 1만 명의 목표치는 일찌감치 달성됐다.
이런 '들끓는' 사이버 여론은 분명히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혹시 우리는 유명인이 140자로 지껄여놓은 말들을 자신의 한정된 네트워크에 퍼뜨리고, 포털 사이트에서 진행하는 서명 운동에 '클릭'하는 것을 마치 대단한 실천이라도 한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인이 옮겨 놓은 대자보를 보면서 '좋아요', '싫어요' 누르는 일을 사회운동에 동참한 것이라고 자기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담하건대, 백날 사이버 공간에서만 들끓어봤자 의료 민영화는 막을 수 없다. 2008년 촛불 집회 때,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 것은 들끓는 사이버 여론이 아니라 광장으로 나선 연인원 100만 명의 촛불이었다. 그나마 그 촛불도 여름을 넘기지 못한 탓에 결과적으로 패했다.
철도 민영화를 막고자 파업을 진행 중인 철도 노동자를 돕는 일은 포털 사이트의 서명 클릭 한 번이 아니라, 리얼 공간에서의 광범위한 연대 활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리얼 공간의 연대 활동이 하도 뜸하다 보니, 이제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시민단체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지금 철도 노동자의 파업은 패하기 일보직전이다.
자, 세상의 진실은 이렇다.
사이버 공간에서 독재자의 목을 수차례 친들 여전히 벨로루시의 대통령은 독재자 루카센코다. 사이버 공간에서 대통령을 아무리 심하게 조롱한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여전히 박근혜다. 사이버 공간에서 10만 명, 100만 명이 '끌리고 쏠리고 들끓어'도 그들은 컴퓨터만 끄면 그만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의 한국어 판 부제는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이다. 새로운 사회는 오지 않았다. 대중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액정 화면에서 백날 손가락을 놀려봤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피와 살이 튀는 현실의 전쟁터를 외면한다면, 세상은 백날 그들이 지배하는 그 모양 그 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