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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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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한 이진경 선생의 감상기(스포 약간)

dma 조회수 : 2,664
작성일 : 2013-08-06 10:47:52
페친이기도 한 후배가 <설국열차> 봤다길래, 볼까 말까 물어봤다가, 만화책 사준다길래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봤습니다.
(아래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거 같으니, 그런 거 싫으면 보지 마셈.^^;; 그래도 최대한 자제하고 쓰겠습니다. 
영화 상영 초반이니...)

가진 전에 여기저기서 냉소적인 평들이 들려서, 사실 큰 기대 안하고 갔습니다. 만화책 받았으니, 보긴 봐야지...그래도 제가 약속은 잘 지키거든요.^^

근데 영화 내내 완죤 몰입하여 보았고, 끝에 가선 감탄사까지 내면서 봤습니다. 마지막에 나온 곰에게 손을 흔들뻔....^^;;

계급투쟁을 직설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편한 분도 있었던 것 같고, 그걸 다루는 방식이 도식적이라는 평도 있던데, 딴 건 몰라도 제가 계급투쟁은 좀 알거든요.^^ 그런 평가...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계급투쟁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적 관심을 가진 저 같은 사람에겐 아주 진지하고 흥미로운 텍스트였어요. 영화를 보면서 반복해서 떠올린 사람은 랑시에르와 벤야민. 이 영화에서 계급투쟁이나 정치를 다루는 방식은 이 두 사람의 생각에 가장 근접해 있었습니다.(통상적 도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계급투쟁이라고 한다면, 혁명이 곡절 끝에 어떻든 '끝/목적지'(기차의 제일 앞 칸)에 도달했을 때, 기차 속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되었을 때, 진정 혁명을 꿈꾼 자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출현한다는 것을 보여줄 때, 이 영화는 통상적인 계급투쟁의 이론을 넘어섭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들의 수, 그것이 인류라고 할 때, 주어진 자리에 주어진 몫을 할당하고 관리하는 것으로서의 치안/통치라는 랑시에르의 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차 안에서의 질서인데, 혁명 내지 정치란 그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수로 세어지지 않는 자들의 수를 세게하는 것이란 점에서 정치의 개념 역시 랑시에르적입니다.

그것은 일단 혁명적 정치가 균형과 통제를 위한 통치로 전화된는 사태인데, 랑시에르는 정치와 통치(치안)을 구별한 바 있지만, 정치가 통치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난점에 대해선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치/통치의 개념은 랑시에르적이지만, 랑시에르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끝칸에 탄자들의 희망의 끝에서 절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허무의 심연을 보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에 허무의 심연이란 그렇게 희망을 끝까지 따라갔을 때, 그 끝에서 출현한 절망과 대면하고 그것을 직시할 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블록버스터가 어떻게 이런 귀착점에 이를 수 있었던가 놀라웠습니다.
희망의 끝에서 '혼자 있음', 그 혼자있음의 고통... 진정한 절망이란, 허무의 심연이란 여럿이 빠져들어도 결국은 그런 혼자있는 곳을 덮쳐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차, 역사나 시간의 상징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은유지요. 역사의 기관차. 벗어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도는 기차 안에서, 저항과 투쟁은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영화는 그럼으로써 도달한 목적지가 목적지가 아님을 말하려 합니다. 진정한 혁명이란 오히려 역사의 기관차를 세우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테제를 이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이 영화는 또 '두 개의 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혁명이란 어쩌면 한 칸에서 다른 칸을 옮겨가는 문의 통과 내지 해체가 아니라, 바깥을 향해 난 다른 종류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들뢰즈라면 '탈주'라는 말로 불렀을 다른 종류의 전략이라고 할 겁니다. 외부, 기차의 정지.... 이는 하나하나의 문을 통과하는데 몰두해 진정 바깥을 보지 못하는 기존의 맑스주의적 정치(혁며주의든, 개량주의나 사민주의든)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만은 아닙니다. 선한 인물들의 반전이 한번은 눈물나고 또 한번은 당혹스러운데, 전자가 현실을 초과하는 극적 성격을 갖는다면, 후자는 기차 안에서 최종적 딜레마를 아는 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충분히 설득적이었습니다. 공연한 반전강박도, 배트맨 식의 억지춘향스런 선악의 해체도 아니어서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면모에 비하면, 비현실적인 디테일(커브트는 열차에서 총질하는 거, 문을 미련스런 방법으로 따거나 깨는 거 등등)은 아주 사소한 결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사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디테일은 이에 비하면 정말 참을 수 없는 비현실성을 갖지 않나요?)

아, 말이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스포일러를 줄이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네요. 저는 시간나면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아주 훌륭한 열차여행이었습니다.

[출처] 이진경님의 설국열차 짧은 평 짱짱..|작성자 사슴개굴

IP : 175.193.xxx.19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3.8.6 10:53 AM (180.64.xxx.168)

    이진경선생이 누구인지 모르나
    굳이 그사람의 평까지 봐야하나 싶군요.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다들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하면서 싸우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무척 재미있게 본 사람인데
    영화하나에 대한 반응들이 이리 뜨거운 것도
    참 의미심장하긴 합니다.

  • 2. dma
    '13.8.6 10:58 AM (175.193.xxx.19)

    점 셋님,
    그리 생각 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진경 선생은 인문학자예요. 강의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낸...
    영화 한 편을 두고 말이 많은 게 이상하고 피곤 할 수는 있지만
    한가지 텍스트를 두고
    각기 다른 위치와 이력을 지닌 이들이 각자의 해석을 내놓고 감상을 풀어 놓는 것이 즐겁지 않으신가요?
    나는 이렇게 보았는데 저 사람은 이걸 또 이렇게 해석하네? 하면서 안복도 넓히는 기분이 들고요.
    작게는 절친들이랑 같이 영화 보고나서 수다 떨 듯이
    82 자게에서 내가 본 영화에 대한 수다를 떠는게 저는 좋더라구요. ^^

  • 3. ..
    '13.8.6 11:03 AM (61.105.xxx.31)

    전 이 영화를 보기전에
    영화를 보면서 가끔 눈물이 나올거 같다는 댓글이 있더라구요
    왜 이런 댓글을 달았을까 했는데..

    제가 보면서 우리 현실과 오버랩되서 그런지 울컥하는 맘도 들도 눈물도 나올거 같더라구요.
    생각할 꺼리와.. 많은 메세지를 주더라구요.
    오락성이 떨어진다 지루하다 하는데..
    전 너무 몰입해서 봤어요.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더라구요

  • 4. dma
    '13.8.6 11:08 AM (175.193.xxx.19)

    저는 아이가 횃불을 들고 달려 올때 울컥 했습니다. ㅠㅠ
    커브 길에서 소용없는 총질을 하는 모습은, 양 진영의 별로 효과없는 반목과 투쟁을 그린 듯도 했고요.
    마지막에 곰이 등장 할때는 엉뚱하게도 웅녀가 생각 나드만요. ^^;;;;;;;;;;

  • 5. 동감
    '13.8.6 11:12 AM (115.41.xxx.163)

    한편의 영화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하는 1인.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기도 하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사유기계'라고도 하잖아요.
    메트릭스처럼 설국열차는 인문학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떡밥을 던져주는 듯해요.^^

  • 6. ...
    '13.8.6 11:13 AM (180.64.xxx.168)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의 감상평과 비슷한
    느낌으로 영화를 봤고 여운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설국열차에 대한 자게의 논란은
    각기 다른 영화평이라기 보다는
    서로 물어뜯는 형국으로 가서 과연 이게
    영화 한편을 두고 일어나는 분란으로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텐데
    이건 꼭 채식주의에 대한 논란처럼
    서로를 물어 뜯기만 하니까요.

  • 7. 좋은 글
    '13.8.6 11:16 AM (210.180.xxx.200)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를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군요.

    저는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폭파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달리는 열차를 타고 궤도를 끊임없이 도는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탈하고 싶은 제 욕망의 대리만족이었거든요.

  • 8. dma
    '13.8.6 11:17 AM (175.193.xxx.19)

    점 셋님.
    그렇게 생각 하셨군요.
    그런 현상을 보고 안타까워 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이 글과 덧글에서는 아직은 ^^ 서로 물어뜯는 모습은 안 보이죠?
    논란이 과열되어 보기 나쁜 모습이 보인다해서 이야기거리, 생걱거리를 외면 하다 보면
    대화와 토론, 발전적인 의견 개진은 결국 점차 사라질 것 같아요.
    그런 속에서도 인내심을 갖고서
    다시 말을 꺼내어 보고 차분히 들어보고 차분히 말해보고 그러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9. ..
    '13.8.6 11:40 AM (175.209.xxx.37)

    본문글은 아직 안읽었고 댓글만 보고 댓글달자면 ..영화에대해 의미부여하는것은 보는사람들의 감상평이 유달리 극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재미있는거구요
    그래서 슬쩍 깍아 내리기도하고 반대로 치겨올리기도하고 그 폭차이때문에 물어뜯는건 이번이 심한데 반응이 뜨거운만큼 당연한거같아요 그리고 다른영화들도 의미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영화만 유달리 그런듯 보이는것 또한 이슈거리죠
    이영화가 재미가있어서 좋게 본 사람과 의미를 두고 재미있다고하는 사람이있듯이 다양한 해석들을 나누고싶은 영화가 있잖아요 이런 현상 자체가 너무 흥미롭지 않나요? 영화라는것도 더 오래 묵혀두면 또 다른 맛이 날때도있거든요 그것까지 기대됩니다

  • 10. ////
    '13.8.6 12:00 PM (115.89.xxx.169)

    저도 놀라울 뿐.. 나는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다른 사람은 재미없게 봤구나 혹은 난 재미없었는데 다른 이들은 재미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될 일을, 서로 알바라느니 하고 칼 세우는 거 보고 놀라움..

    (그렇게 따지면 디워만 한 영화가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 11. 좋은 글이네요.
    '13.8.6 12:16 PM (118.44.xxx.4)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지적인 시각으로 설명되었는데 사실 근본 느낌은 똑같은 것 같군요.
    어느 분이 횃불 얘기 하셨는데
    저는 횃불로 돌파구 여는 거 보면서
    우리의 촛불시위를 떠올렸어요.
    촛불의 힘. 그 위력을 봉감독이 보여준 게 아닐까 하는 저 혼자만의 해석?

  • 12. --
    '13.8.6 2:00 PM (175.223.xxx.175)

    이진경씨 좋아하는데 이렇게 그의 글 읽을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이영화 참 좋았어요.

  • 13. ㅠㅜ
    '13.8.7 12:44 AM (211.33.xxx.169)

    전 영화보면서 진짜 나가고싶었어요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는게 두렵고 무섭고 슬프고 가슴이 떨려서요ㅠㅠ
    그치만 마지막 장면이 긴여운을 깨주더군요아마 마지막에 희망으로 끝나지않았다면 전 영화에 계속 빠져있었을거같아요ㅎ

  • 14. 더운데
    '13.8.7 2:32 PM (1.236.xxx.69)

    아 저기는 정말 춥겠다.. 시원하겠다...
    어제 늦은 밤에 봐서 정리는 좀 해봐야 겠어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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